World Flow
016. D+24
D+24
D+24에는 공식 포토와 프로필, 멤버별 자료, 다음 라이브의 암시가 한꺼번에 묶여 보이기 시작한다.
쇼케이스 이후 며칠 동안 공식은 사진을 조금씩 풀었다. 단체컷, 무대 풀샷, 악기 디테일, 멤버별 컷. 포털에는 원재경 이름이 먼저 떴고, 다른 멤버들은 하루 이틀 늦게 따라왔다. 사람들은 그 작은 차이까지 씹었다. 회사가 누구를 먼저 세우느냐는 말, 프로필 반영 순서에 의미를 붙이는 말, 실은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말. 인터넷은 늘 과로한다. 급여도 없으면서.
D+24 오전까지도 판은 지저분했다. 쇼케 후기는 좋았고 사진도 돌았는데, 소리는 아직 200명 입을 거쳐야 했다. 흔들린 사진은 증거가 되기엔 예뻤고, 후기 문장은 너무 잘 써서 오히려 의심을 샀다.
쇼케 잘했다며 영상은 왜 없어200명 후기만 믿으라는 거냐사진 말고 소리를 달라고요기획형 밴드면 라이브 클립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플라스틱 밴드 소리 듣기 싫으면 치는 걸 보여 주면 되잖아근데 지금 영상 주면 긁힌 것 같긴 해
사람들은 모순을 너무 편하게 쓴다. 영상이 없으면 욕하고, 영상이 나오면 긁혔다고 할 준비까지 해 둔다. 포매터즈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예쁜 쇼케 편집본은 아니었다. 무대도 객석도 없는 방. 녹음 당일의 스튜디오 세션. 말이 길면 변명처럼 보였을 테니 제목만 남겼다.
glassh(our) — Blue Light / Raw Studio Session
오후 5시 58분, 홍보팀 단톡방에 썸네일 하나가 올라왔다. 파란 조명도 없고, 무대도 없고, 멤버 이름도 없었다. 합주실 천장등 아래에서 원재경이 마이크 앞에 서 있는 첫 프레임. 고선우는 화면 끝에서 페달을 밟고 있었고, 차규빈의 하이햇은 너무 가까웠다. 윤다정은 노트북을 보고 있었고, 한준희의 베이스 헤드가 오른쪽 아래에서 잘렸다.
“이거 해명처럼 보이나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해명이면 문장이 더 길었겠죠.”
6시가 되자 알림이 떴다. 첫 댓글은 빨랐다.
긁혔네.
두 번째 댓글은 더 빨랐다.
근데 보니까 긁힐 만했네.
업로드 3분
사람들은 아직 다 보지도 않고 말부터 했다.
뭐야 글래시 영상 올라옴Raw Studio Session????포매터즈 뭐야 갑자기Blue Light 하나만 준 게 더 얄미움썸네일 보니까 쇼케 영상 아닌데옷이 너무 편한데요이걸 예고도 없이 올린다고?
영상은 고급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시작 전에 누가 케이블을 건드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고, 차규빈이 하이햇을 닫았다가 열었다. 고선우는 오른손을 한 번 털고, 윤다정은 화면을 보며 패치를 확인했다. 한준희는 베이스 줄을 아주 작게 눌렀다. 원재경은 마이크 앞에서 숨을 들이켰다. 공연장에서 들리면 묻힐 소리들이 여기서는 너무 가까웠다.
0:03 하이햇 여는 소리0:05 원재경 숨 들어감0:07 고선우 피킹 준비하는 손0:08 윤다정 진짜 장비 봄0:10 준희 베이스 줄 살짝 건드림
여기서 말이 조금 바뀌었다. 멋있다보다 하고 있네가 먼저 나왔다. 화려한 무대보다 방 안의 손이 더 믿길 때가 있다. 촌스럽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첫 소절
원재경 보컬이 들어오는 순간, 영상의 거리가 정해졌다. 음원처럼 매끈하게 깎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다. 숨이 들리고 자음이 붙고, 입 안쪽의 작은 마찰이 들렸다. 가까운데 안정적이었다. 이 애매한 지점이 사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무 못하면 조롱하면 되고, 너무 완벽하면 보정이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사람인데 버티면 말을 고쳐야 한다. 귀찮지. 그래도 고쳐야지.
원재경 보컬이 음원보다 덜 차가운데 더 좋다숨소리 들리는데 안 거슬려이게 원테이크면 조금 무섭다크게 안 하는데 마이크 앞에 바로 서는 타입이네예전 커버 얘기 왜 도는지 알 것 같음 근데 지금 걸로 말하자
이때만큼은 바깥 사람들도 같은 영상을 봤다. 깊이 들어온 건 아니었다. 이름을 다 외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음에 다시 마주치면 아 그 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윤곽이 생겼다. 아주 잠깐, 흩어져 있던 사진과 후기와 과거 파일이 한 화면 안으로 모였다.
마지막 말이 중요했다. 현재 자료가 생기면 과거를 완전히 지우진 못해도 덜 잔인하게 만든다. 원재경 팬들은 그 문장을 바로 붙잡았다.
예전 커버 찾지 말고 이거 보자지금 자료 이렇게 줬는데 왜 비공개 영상 얘기해원재경은 가까운 소리 때문에 더 조심해야 돼
드럼
차규빈은 이 날 제일 조용하게 이겼다. 플라스틱 밴드라는 말은 보통 드럼에서 먼저 박힌다. 너무 반듯하면 기계 같고, 너무 흔들리면 신인이라고 까인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는 하이햇이 살아 있고, 킥이 기계처럼 붙지 않았고, 작은 노트들이 뒤에서 보였다. 요란한 드럼캠도 아닌데 손이 보였다. 드러머한테 이보다 비싼 자료는 별로 없다.
차규빈 팬들은 그동안 후기만 들고 있었는데, 이제 모두가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안 흔들림이라는 말이 칭찬이면서 책임으로 바뀌는 날이었다. 차규빈에게는 아마 그쪽이 먼저 왔을 것이다. 잘했다보다 다음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쪽.
기타와 신스와 베이스
고선우는 영상에서 사진보다 덜 안전했다. 손이 보이고, 피킹 간격이 보이고, 픽이 줄에 걸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손 얘기를 다시 했다. 고선우가 싫어할 만했다. 다만 이번에는 손만 말하지 않았다. 소리까지 같이 말했다.
고선우 피킹 소리 들려원재경 기타랑 고선우 기타가 좌우로 나뉘는 게 보여손사진으로 난리 난 이유를 소리로 알겠음빨간 재즈마스터는 아니어도 고선우는 고선우네사진보다 영상이 낫다
윤다정은 화면 구석에서 가장 바빴다. 신스가 앞에 나오지 않았는데 빠지면 곡이 비었다. 이건 팬들이 좋아하는 종류의 발견이었다. 눈에 덜 띄는 사람이 갑자기 필수로 보이는 순간. 다정은 댓글보다 파일 상태를 먼저 볼 사람이지만, 신스 빠지면 허전하다는 말은 모를 수 없었다.
윤다정 없으면 Blue Light 갑자기 허전해질 듯화면 구석에서 계속 일해신스가 장식이 아니라 파란 부분을 잡고 있었네윤다정 작업물 모음 보고 온 사람들 오늘 다 납득했을 듯
한준희는 드디어 화면으로 설명됐다. 학교 공연 영상처럼 멀지도 않았고, 사진처럼 반만 잡히지도 않았다. 베이스가 과시하지 않았는데 곡이 빈칸 없이 걸었다. 준희 팬 후보들은 바로 다음 요구를 냈다.
준희 베이스 생각보다 잘 들려사진보다 영상인 멤버 맞네Parallel Raw 주세요Blue Light에서도 이러면 패러렐은 진짜 봐야지
플랫폼마다 다른 말
유튜브 댓글은 의외로 차분했다.
No stage, no crowd, just the band.The hi-hat detail is insane.Jaekyung sounds closer here.Dajeong is doing so much in the background.Junie’s bass is clearer than I expected.Gyubin is the backbone.
X는 바로 잘랐다. 원재경 숨, 고선우 손, 차규빈 하이햇, 윤다정 패치, 한준희 베이스. 공식 영상 하나가 다섯 개의 짧은 클립으로 쪼개졌다.
Blue Light Raw 하나로 판 좀 바뀐 듯포매터즈 말 안 하고 영상만 올리는 거 재수 없게 잘하네원재경 음원보다 사람이라 좋다차규빈 하이햇 들으면 플라스틱 밴드라는 말 못 하겠는데윤다정 저 구석에서 색 다 잡고 있었네한준희 드디어 보인다왜 Blue Light만 줘?
더쿠는 더 솔직했다.
인디 쪽은 가장 박하게 인정했다.
이 정도면 판이 넘어간 듯 보이지만, 깨끗하게 끝나진 않았다. 그런 적이 있었으면 인터넷이겠나.
공식 영상인데 뭘 완전 검증이라고 해마이크 세팅도 좋고 편집도 있는데원테이크인지 어떻게 알아그래도 플라스틱 한 단어로 까기는 이제 좀 게으르다영상 더 주면 믿겠다결국 더 달라는 거잖아
막연한 조롱이 구체적인 요구로 바뀌었다. 가짜 아니냐에서 Bleed도 보여 줘로. 그건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훨씬 나은 골칫거리였다.
멤버들 쪽
멤버들은 당일에야 제대로 알았다. 업로드 알림이 뜨고, 단톡이 잠깐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원재경은 안도와 민망함을 같이 받았다. 예전 커버가 아니라 지금의 Blue Light로 말이 돈다는 건 좋았다. 그런데 숨과 입소리까지 좋아한다고 하면 또 너무 가까웠다. 고선우는 짜증이 났고, 동시에 자기 소리가 드디어 들렸다는 반응을 못 싫어했다. 차규빈은 칭찬보다 다음 공연의 기준이 올라간 걸 먼저 봤다. 윤다정은 댓글보다 소리 파일의 상태를 확인했고, 그 뒤에야 신스 빠지면 허전하다는 말을 저장했다. 한준희는 웃다가 Parallel Raw 요구를 보고 조금 조용해졌다. 요구는 칭찬보다 오래 남으니까.
회사 쪽
포매터즈 사무실에서는 조회수보다 댓글 방향을 먼저 봤다. 플라스틱 밴드는 줄었고, Raw 전곡은 늘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셋이 생긴다. 이 바닥의 성실한 저주다.
“추가 공연 공지 타이밍은요?”
“오늘은 아닙니다.”
“내일도 빠릅니다.”
“그럼 멤버컷?”
“D+26. 영상 반응이 기사로 한 번 돌고 난 다음.”
“기사 제목은 못 막죠?”
“못 막습니다.”
실제로 다음 날 아침 제목은 좀 노골적이었다.
glassh(our), ‘Blue Light’ Raw Studio Session 공개…무대 밖 합주 기록
‘플라스틱 밴드’ 의심에 말없이 답한 glassh(our)
두 번째 제목은 포매터즈가 싫어할 만했다. 회사가 쓰면 촌스러웠을 문장을 기자가 쓰면 기사처럼 보인다. 참 편리한 외주다.
밤 11시
밤이 되자 말이 조금 더 길어졌다.
Raw Session이 좋은 이유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각 파트가 뭘 하는지 보여서다. Blue Light는 음원에서는 원재경 곡처럼 먼저 들리는데, 이 영상에서는 차규빈 하이햇, 윤다정 신스, 고선우 오른손, 한준희의 낮은 움직임이 같이 보인다. 그래서 글래시가 보컬 중심 프로젝트가 아니라 방 안에서 같은 곡을 붙잡는 팀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바로 이런 댓글이 붙었다.
근데 그래서 Bleed는요?
이게 D+24의 결론에 더 가깝다. 쇼케를 못 본 사람들에게 공통 자료가 생겼다. 그런데 그 자료는 의심을 끝내지 않았다. 다음 곡과 다음 무대를 더 요구하게 만들었다. 플라스틱 밴드라고 놀리던 사람들이 이제 Bleed Raw를 달라고 했다.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공식 영상일 뿐이라는 말도 남았고, 마이크 세팅이 좋다는 말도 남았고, Blue Light 하나로 팀을 판단하긴 이르다는 말도 남았다. 그래도 방 안에서 다섯 명이 한 번 버텼다. 그날 이후 다음 공지는 팔리는 게 아니라 기다려지는 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다만 그 선명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타임라인은 다음 날이면 다시 흩어질 것이다. 그래서 더 강했다. 붙잡히지 않는 빛은 대개 한 번 본 사람이 더 오래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