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002. 담요와 캡슐
담요와 캡슐
새벽의 담요, 아침의 도어록, 정오의 캡슐. 다정이 '이게 처음이 아닐 가능성'에 도달하는 하루.
새벽
다정이 합주실에 혼자 남는 건 평소 패턴이었다.
다섯 명이 같이 합주 끝나고, 차규빈이 제일 먼저 나가고, 한준희가 그 다음, 고선우가 페달보드 앞에 한 시간 더 남고, 원재경이 노트북 닫고 인사 한 번 하고 나가고. 고선우가 톤 확인 끝나면 합주실 문 잠그고 나가는 게 마지막 자리. 그러나 다정은 그 후에도 남는 날이 있었다. 사운드 디자인은 합주실의 일이 끝난 다음에 제대로 시작되는 일이라서.
새벽 한 시.
모니터 헤드폰이 다정의 두 귀에 씌워져 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 위로 빨간 LED가 한 번 점등됐다 꺼졌다. 신스 패치 한 층이 화면 위에서 다음 마디로 넘어간다. 다정의 손가락이 페이더 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은 시계와 분리된 자리에서 굴러간다. 외주 노동의 몸이 가장 정직하게 작동하는 자세. 합주실의 일이 다 끝난 후의 적막 위에 다정의 손만 움직이는 자리.
페이더 한 번. 노트 한 줄. 헤드폰 너머에서 다음 마디가 들어온다. 같은 마디 다섯 번. 컴프 레이시오 살짝 올림. 같은 마디 또 다섯 번. 사이드체인 트리거 키 한 단계 위로. 같은 마디 또. 외부에서 보면 같은 동작의 반복인데, 다정의 손은 매 반복마다 다른 자리를 만지고 있다. 사운드 디자인의 일이 그렇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자리를 보는 일.
세 시 사십 분쯤.
페이더가 한 번 정지한다. 다정의 머리가 모니터 앞으로 살짝 기울었다 다시 들린다. 한 번 더 기울인다. 이번엔 들리지 않는다. 헤드폰이 머리 위에 걸친 채로, 다정이 신디 앞에서 까무룩 잠에 든다. 페이더 위에 손가락이 놓인 채로. 모니터 화면이 다음 마디로 넘어가지 않은 채 멈춰 있다.
차규빈은 평소 새벽 네 시에 자는 사람이었다. 네 시에 자려면 그 전에 한 시간쯤 모든 자극을 차단해야 하는 사람이라서, 보통 두 시 반쯤부터 핸드폰을 두고 침대에 들어간다. 두 시 반에 들어가서 네 시에 자는 그 한 시간 반은 차규빈의 몸이 가장 정직하게 작동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날은 두 시 반에 들어가서 네 시에 자지 못했다. 한 가지가 머릿속에서 굴러가지 않아서.
핸드폰을 다시 든다. 합주실 도어록은 마지막에 잠근 사람의 출입 기록을 보여 준다. 그날 자정쯤에 한 사람이 합주실에 다시 들어간 기록이 있었다. 다정이었다. 합주 후에도 다정이 남는다는 사실은 다섯 명 다 알고 있는 패턴인데, 자정 이후에도 남아 있다는 건 평소보다 길었다. 차규빈은 시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가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일이 생기면 그 한 가지를 시계 위에 얹어서 본다.
세 시 오십칠 분.
차규빈이 합주실 도어록 앞에 서 있다. 비번을 누른다. 도어록이 한 번 깜빡인다. 문이 열린다. 합주실 안의 광경. 신디 앞에 다정이 헤드폰을 머리 위에 얹은 채로 잠들어 있다. 모니터 화면이 같은 마디에서 멈춰 있다. 페이더 위에 손가락이 놓여 있다.
차규빈이 한 박 멈춘다. 들어와도 되는 자리인지 한 번 가늠한다. 다정이 일하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게 글래시 합주실의 룰 위반인지 아닌지. 그건 룰에 박혀 있지 않은 자리였다. 박혀 있지 않은 자리에서는 자기 판단으로 결정해야 한다.
소파 위 담요를 든다. 회색 담요. 다정이 평소 모니터 작업할 때 어깨가 시리다고 한 번 발화한 적이 있어서, 다정이 그 담요를 가끔 어깨에 두르고 작업하는 걸 차규빈이 본 적 있다. 지금은 머리 위로 헤드폰이 걸쳐져 있고, 어깨엔 아무것도 없다. 합주실 새벽 온도가 24도보다 한두 단계 떨어져 있다. 새벽이라서.
다정의 어깨 위로 담요를 가만히 덮는다. 다정이 깨지 않게. 손이 다정의 어깨에 닿지 않도록. 담요만 어깨 위에 놓고, 손이 한 발 떨어진다. 차규빈이 합주실 문을 다시 닫는다. 도어록을 다시 잠그지는 않는다. 다정이 일어나서 작업을 마저 하다가 나갈 때 본인이 잠그도록. 잠그면 다정이 자기가 깬 사이 누가 들어왔다는 걸 도어록 로그로 알아챌 수 있어서.
차규빈이 자기 침대로 돌아간다. 네 시 반쯤. 그날은 결국 네 시 반에 잤다. 평소보다 삼십 분 늦은 자리.
다음 날 아침
다섯 시 사십 분쯤. 다정이 깨어난다. 까무룩 든 잠이라 한 시간 사십 분쯤 잤다. 평소 다정의 잠 패턴이었다. 합주실 새벽 작업 중 까무룩 들어가면 두 시간 안에 깬다. 외주 노동의 몸이 자동으로 알람을 박아 두는 자리. 머리 위 헤드폰을 손가락으로 미끄러뜨려 목에 건다. 어깨에 무언가가 얹혀 있다. 담요. 합주실 소파 위에 평소 있는 회색 담요. 다정이 잠깐 멈춘다.
내가 이걸 두르고 잤던가. 까무룩 잠들기 직전에. 그 가능성을 한 번 가늠한다. 까무룩 잠들기 직전의 동작은 보통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동으로 굴러가니까, 어깨에 담요 두른 동작도 자기가 한 거일 가능성이 있다. 평소 어깨가 시린 자리에서 담요 두르는 게 다정의 자동 동작이라서. 페이더 위 손가락. 같은 마디에서 멈춘 모니터 화면. 컴프 레이시오 한 단계 올라간 채로. 자기 손이 멈춘 자리가 그대로 박혀 있다. 다정이 신디 앞에서 다시 작업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음 마디로 넘어가는 자리에서, 우뚝 멈춘다.
도어 록.
분명, 합주실 안에 들어올 때 도어 록을 잠갔다. 자기가 작업할 때는 항상 안쪽에서 잠그는 게 평소 패턴이라서. 그런데 지금 합주실 문이 잠겨 있는지 풀려 있는지를 다정의 손이 모른다. 자기가 까무룩 잠들기 전에 안쪽 잠금을 풀었던 기억이 없다. 다정이 일어나서 도어록 쪽으로 간다. 잠금 상태를 확인한다. 풀려 있다. 안쪽에서 한 번 더 잠근다. 그 손이 정확히 누른다. 다정이 도어록을 누르는 동작은 평소 손에 익어서, 누른 직후에 디스플레이가 한 번 깜빡이는 패턴까지 안다.
다정의 손가락이 도어록에서 멀어진다. 한 발 떨어져서 도어록을 본다.
새벽에 누군가 들어왔다.
이 가능성이 한 번 떠오른 자리에서, 다정의 머릿속이 한 박 정지한다. 합주실 비번을 아는 사람은 다섯 명 + 임차 관리 사무소. 사무소 사람이 새벽에 들어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섯 명 중 한 명. 그게 누구인지 다정이 가늠하려 한다.
가늠하지 않는다.
가늠하지 않기로 한다. 누구인지 본인이 알아채면, 그 사람과 마주치는 자리에서 발화하게 될 것이다. 발화하면 위치가 고정된다. 다정의 자세는 평소 합주실 안에서 발화 안 하는 자세였고, 자기 자리에서도 그 자세가 유지된다.
신디 앞으로 돌아간다. 어깨 위 담요는 그대로. 페이더 위에 손가락이 다시 놓인다. 컴프 레이시오 한 단계 더. 같은 마디 다섯 번. 다음 마디. 외주 노동의 몸이 자동으로 굴러간다. 새벽에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마치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다. 다정의 작업이 다음 마디로 넘어간다.
여섯 시 반. 작업이 한 자리에서 마무리된다. 다정이 노트북을 닫는다. 헤드폰을 신디 옆에 둔다. 어깨 위 담요를 접어서 소파 위에 다시 둔다. 평소 자리에. 가방을 든다. 합주실 도어록을 잠그고 나간다.
정오
오후 두 시 합주.
다섯 명이 도착한다. 평소 패턴. 윤다정이 가장 먼저 와 있고, 차규빈이 두 번째, 고선우가 세 번째, 한준희가 네 번째, 원재경이 다섯 번째. 다정은 이미 신디 앞에 있다. 모니터 화면 위로 새벽에 작업한 패치 한 층이 새로 박혀 있다. 다정의 손이 평소처럼 작업 중인 자세.
차규빈이 들어온다. 왔어요? 다정의 인사가 신디 너머에서 흘러나온다. 응. 차규빈이 받는다. 같은 인사. 평소 같은 자리. 두 사람 사이에서 다른 정보는 흐르지 않는다. 차규빈이 드럼 셋 뒤로 가서 스틱을 든다.
다정의 시선이 모니터 화면에 머물러 있다. 차규빈의 동작은 시야 안에 들어와 있다. 평소 패턴 그대로다. 차규빈이 평소 새벽 네 시에 자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다정이 안다. 평소 새벽 네 시에 자는 사람이 새벽 세 시 오십칠 분에 합주실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다정의 시야 안에 한 번 떠오른다. 떠오른 채로, 다정의 손이 다음 페이더로 옮겨간다. 가늠하지 않는다.
고선우가 들어온다. 페달보드 옆에 기타 케이스. 한준희가 들어온다. 베이스 케이스. 한준희의 손이 합주실 한쪽 구석의 캡슐 커피 머신 쪽으로 간다. 평소 한준희가 합주 시작 전에 캡슐 커피 한 잔 내리는 패턴. 캡슐 박스에서 한 알을 꺼내는 손가락이 잠시 멈춘다. 다정 쪽을 보지 않은 채.
“언니, 그 새 캡슐 어땠어요?”
다정의 손이 페이더 위에서 한 번 정지한다. 새 캡슐. 다정이 좋아하는 콜롬비아. 어제 저녁 합주 끝나고 한 잔 내려 마셨다. 평소 마시던 거. 어제 마신 자리에서 캡슐이 한 박스 새로 와 있었다는 걸 다정이 인지하지 못한 채 마셨다. 평소 다정이 자기 손으로 한 박스씩 사다 놓는 패턴이라서, 캡슐이 새로 와 있는 게 자기가 사다 놓은 거라고 자동으로 처리됐다.
“어, 그거 한 잔 마셨어. 좋더라.”
다정의 답이 한 박 늦게 떨어진다. 평소보다 0.3초쯤 늦은 자리. 그 한 박을 한준희가 알아챘는지 안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다. 한준희가 다음 발화를 잇는다.
“다행이다. 제가 어제 가져다 둔 건데.”
캡슐 머신에서 커피가 내려온다. 한준희가 머그를 든다. 평소 같은 동작. 다정 쪽을 한 번 보지 않는다.
다정의 손이 페이더 위에서 정지한 채로 있다. 한 박이 아니라 길게.
캡슐. 한준희가 어제 가져다 놓은 캡슐을 다정이 자기가 사 놓은 거라고 처리했다. 그게 한 자리. 담요. 새벽에 누군가 어깨에 둘러 준 담요를 다정이 자기가 까무룩 잠들기 전에 둘렀다고 처리했다. 그게 다른 한 자리. 도어록. 새벽에 누군가 들어왔다가 다시 잠그지 않고 나간 자리. 다정이 잠그러 갔던 그 자리. 그게 또 다른 한 자리. 세 자리. 한 명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다.
세 자리가 한 번에 떠오른 자리에서, 다정의 시야 안에 한 가지가 한 번 더 떠오른다.
이게 처음이 아닐 가능성.
평소 다정이 자기가 했다고 처리해 온 일들 중에서, 사실 다른 사람의 손이 들어왔던 자리가 더 있을 가능성. 매주 합주실에서 다섯 명이 같이 일하는 시간 안에서, 다정이 자기가 자동으로 처리했다고 인지한 일들 중 어떤 자리들이 다른 사람의 손이 들어와서 처리된 자리였을 가능성. 누적된 양은 다정이 모른다. 다정의 외주 노동의 몸이 그 자리들을 자기가 한 일로 자동 처리해 와서.
다정의 페이더 위 손이 정지한 채로 있다. 머그를 든 한준희가 베이스 앰프 옆 자리로 돌아간다. 캡슐 커피 머신의 LED가 한 번 깜빡이고 꺼진다. 합주실 안의 다른 사람들은 평소 패턴 그대로 자기 자리에서 굴러간다.
“다정아.”
원재경의 발화가 마이크 스탠드 앞에서 떨어진다. 평소 같은 호명. 다정이 한 번 신디 너머로 시선을 든다.
“네.”
“여기 패드 한 번 들어 볼게.”
“응.”
다정의 손이 페이더 위에서 다시 움직인다. 평소 같은 자세. 외주 노동의 몸이 자동으로 굴러간다. 합주실의 일이 정상 페이스로 돌아간다.
다만 한 박이 영구히 박힌다. 다정의 시야 안에. 발화되지 않은 채.
차규빈의 시선이 한 번 다정 쪽으로 흐른다. 다정의 페이더 위 손이 평소보다 0.3초 늦은 자리에서 다시 움직였다는 걸 차규빈이 잡는다. 잡은 걸 잡은 대로 처리한다. 시선이 다시 박으로 돌아간다. 입은 열리지 않는다.
합주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