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Flow
018. 울타리 앞
울타리 앞
첫 번째 울타리 앞에 도착한 뒤, 이제 글래시는 설정이 아니라 사람과 소리와 기억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듣기 시작했다. 다만 한꺼번에 고상해진 건 아니었다. D+24처럼 모두가 같은 영상을 보던 시간은 지나갔다. 누군가는 아직 원재경 얼굴 컷만 저장했고, 누군가는 고선우 손 사진을 확대했고, 누군가는 취향은 별개라고 세 번 말한 뒤 Blue Light를 플리에 넣었다. 그래도 아주 작은 변화는 있었다. 하이햇이 더 이상 차규빈 진짜 치네의 증거로만 들리지 않았고, 피킹이 고선우 실제네의 증거로만 남지 않았다. 숨소리도 원재경 음원빨 아니네에서 조금 벗어났다. 증거 일을 하느라 바쁘던 소리들이 다시 곡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아래에는 이런 댓글도 붙었다.
난 아직 진짜냐 아니냐로 듣는 중취향은 아닌데 영상은 봤어원재경 얼굴 얘기 너무 많아서 피곤한데 노래는 계속 듣게 돼팬 아니야 이 말 이제 금지하자 제발금지하면 나 뭐라고 해
Blue Light는 입구였고, Pale Blue Dive는 몸을 앞으로 당기는 곡이었고, Mercury는 가까워지는 곡이었다. Bleed는 새는 소리였고, Parallel은 늦게 오는 곡이었고, Midnight Space는 멀어진 게 아니라 넓어진 곡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이 말도 너무 깔끔하다. 실제 댓글창에서는 훨씬 덜 정돈됐다.
글래시는 끝까지 우리는 하나예요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팀처럼 보였다는 말이 돌았다. 사실 그 말도 좀 예쁘다. 현장에선 더 투박하게 쓰였다. 붙어 있는 팀은 아닌데 곡에서는 안 빠져, 서로 안 침범해서 좋다, 원재경 중심인데 원재경만 남으면 망해. 이쪽이 더 정확했다.
물론 갤은 끝까지 곱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또 필요했다. 다정한 말만 남으면 금방 박제되고 식는다.
울타리 앞이라는 말은 그래서 맞았다. 넘은 게 아니라 도착한 쪽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고민은 남아야 했다. 아무 고민 없이 들어온 호감은 대개 빨리 나간다.
그날 밤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썼다.
아직 팬은 아니야.
그리고 4분 뒤 같은 계정이 Parallel은 왜 지금 더 좋지라고 썼다. 말은 늘 늦는다. 몸이 먼저 들어가고, 명칭은 뒤에서 허둥댄다. 다음은 더 큰 방이다. 그 방에서 이 조용한 의심과 조용한 애정이 어떻게 들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제 사람들은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 들어가려고 묶는지, 도망치려고 묶는지는 각자 다르게 우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