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Flow
010. D+1~D+13
D+1~D+13
발매 이후 말의 온도는 후기와 검증으로 넘어가고, 모든 논쟁은 결국 라이브를 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모인다.
D-Day가 지나자 말의 온도가 바뀌었다. 전날까지 사람들은 음원을 틀어 놓고 각자 자기 체면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다음 날부터는 조금 더 잔인해졌다. 전곡을 두세 번 돌린 사람들이 후기처럼 말하기 시작했고, 덜 들은 사람들은 많이 들은 척했고, 마음에 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마음에 안 든 사람들은 마침내 자기가 쓸 수 있는 가장 편한 말을 찾았다. 플라스틱 밴드. 참 편리한 말이다. 예쁘고, 매끈하고, 회사 손이 보이고, 아직 라이브를 안 보여 준 팀을 한 번에 낮춰 부를 수 있다. 반쯤은 억지고 반쯤은 정확해서 더 오래 간다.
말은 세 갈래로 흐른다. 음원은 꽤 괜찮다. 근데 너무 잘 꾸며져 있다. 그러면 라이브를 봐야 한다. 좋은 말도 그쪽으로 가고, 싫은 말도 그쪽으로 간다. 모든 길이 작은 공연장 문 앞으로 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지옥이다.
D+1, 전곡을 두 번째로 듣는 사람들
발매 당일의 말은 빠르다. 정오부터 자정까지는 사람들도 곡보다 앞서 뛴다. D+1 아침이 되어서야 말이 조금 느려진다. 출근길, 등교길, 알바 오픈 전, 점심시간 전에 다시 듣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때 제일 많이 나온 말은 트랙 순서였다. Blue light가 첫 곡인 이유, Bleed가 네 번째에 있는 이유, Parallel이 전날보다 덜 밋밋해지는 이유. 전날에는 곡별로 떠들었는데 다음 날은 EP 단위로 듣는 사람이 늘어난다. 신인 EP가 이 말을 듣는 건 꽤 큰 일이다. 다만 그 말 뒤에는 꼭 붙는다. 그래서 라이브는.
D+1의 칭찬은 조심스럽다. 좋다보다 생각보다가 아직 더 많이 붙는다.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다. 생각보다 곡이 안 허술하다. 생각보다 보컬이 남는다. 그런데 이 말들은 이미 일종의 패배 인정이다. 정말 관심 없으면 생각보다를 붙일 일도 없다. 듣고 나서 자기 입장을 고쳐 쓰는 데 쓰는 말이니까. 반면 가장 많이 보이는 견제는 너무 처음부터 완성형이라 거리감 있다였다. 이 팀이 받을 비호감은 조악함이 아니다. 너무 말끔함이다. 아주 비싼 욕이다.
밴드 쪽 커뮤니티는 더 건조했다. 멤버 이름이 열린 뒤라 차규빈, 고선우, 윤다정, 한준희 이름도 돌기 시작했지만, 그쪽은 호감보다 확인 욕구가 먼저다. 음원에서 드럼이 너무 안정적이면 실제로도 그렇게 치는지 보고 싶고, 기타가 절제돼 있으면 현장에서 어떤 톤을 쓰는지 보고 싶고, 신스가 깨끗하면 노트북과 키보드 사이가 얼마나 튼튼한지 보고 싶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낭만적인 척하지만, 막상 공연 앞에서는 꽤 실무적이다. 그래서 D+1의 표어는 거의 이것으로 굳었다. 음원은 합격. 라이브는 보류.
D+2, 곡별 파벌과 과열 피로
D+2에는 팬 후보들이 자기 곡을 지키기 시작한다. Blue light가 저평가라는 사람, Pale Blue Dive가 후반부에서 산다는 사람, Mercury는 훅곡 이상이라는 사람, Bleed가 팀 색이라는 사람, Parallel은 밤에 들어야 한다는 사람, Midnight Space는 여섯 번째라 가능한 곡이라는 사람. 발매 이틀 된 EP가 벌써 억울한 곡을 만든다. 사람은 참 빨리 편을 든다. 그리고 그렇게 편을 드는 순간, 바깥에서는 바로 피곤하다는 말이 붙는다.
D+2부터 바이럴이라는 단어도 커진다. 공식이 잘 던진 불씨와 자연 반응이 섞였을 때 커뮤니티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자기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남의 손을 의심한다. 아주 인간적이고 아주 못됐다. 물론 포매터즈가 불씨를 잘 던진 것도 맞다. 틀린 욕이 아니라서 더 오래 붙는다. 이때 글래시는 이상한 자리에 놓인다. 호감층은 이 정도면 잘함이라고 하고, 비호감층은 너무 잘 포장됨이라고 한다. 둘 다 같은 사실을 다른 감정으로 말하는 셈이다.
D+3 — 원재경이 가장 먼저 맞는 날
D+3의 원재경 플은 커버 이야기로 바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 전에 이미 풀버전이 이틀 동안 사람들 귀에 붙어 있었다. Blue light 첫 문, Pale Blue Dive의 밀도, Bleed의 가사, Midnight Space의 마지막. 사람들은 현재의 원재경을 먼저 씹고 있었다. 이 사람이 노래를 정말 이렇게 부르는지, 가사를 자기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밴드 안에서 너무 앞에 놓인 건 아닌지. 관심은 호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검증에 더 가깝다.
원재경은 제일 먼저 칭찬받고, 제일 먼저 맞는다. 보컬이 앞에 있으니까. 크레딧에 이름이 있으니까. 백금발과 흰 기타와 목소리가 한꺼번에 기억되니까. 목소리 좋다 다음에는 바로 근데 라이브에서 저만큼 되냐가 붙고, 가사 좋다 다음에는 너무 잘 닦은 말 아니냐가 붙는다. 이때의 말들은 아직 악플이라기보다 손전등이다. 그런데 손전등도 얼굴에 대고 오래 비추면 충분히 폭력적이다.
그다음에야 과거 이야기가 올라온다.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현재의 원재경이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뒤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사운드클라우드가 있었다더라. 어쿠스틱 커버가 있었다더라. 회사 들어오면서 내렸겠지. 저장한 사람 없나. 이런 말들이 돌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이 호기심이 바로 호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은 궁금하고 반은 의심이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소리를 했는지, 밴드 붙고 나서 만들어진 표면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이날의 자정은 초반 팬덤의 성격을 만든다. 궁금한데 너무 파지 말자와 궁금한데 어떡해이 같이 돈다. 아직 팬덤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무리지만, 이미 자기들끼리 선을 긋는 흉내를 낸다. 웃기고 피곤하지만 필요하다. 아무 선도 없는 과열은 금방 흉해진다.
D+4, 다른 멤버들이 악기와 함께 보이기 시작하는 날
원재경만 보는 흐름은 오래 못 간다. D+4쯤 되면 다른 이름들이 올라온다. 고선우의 빨간 기타, 차규빈의 드럼 안정감, 윤다정의 신스와 크레딧, 한준희의 낮은 쪽. 이때도 대중은 친절하지 않다. 이름을 정확히 외워 주는 대신 악기와 색으로 부른다. 빨간기타, 드럼언니, 건반, 베이스. 그래도 이 변화는 중요하다. 글래시가 원재경과 나머지로만 굳기 전에, 팀 안쪽의 역할이 보이기 시작한다.
D+5 — 200석이 숫자가 아니라 흉기가 되는 날
D+5에 쇼케이스 세부 공지가 다시 올라오자 음악 이야기는 잠시 밀렸다. 사람들은 좌석을 본다. 예매 시간을 본다. 1인 몇 매인지 본다. 관계자석이 있겠지 하고 먼저 욕한다. 공연장 위치와 시야와 의자 간격을 찾는다. 낭만은 예매 공지 앞에서 늘 아주 빠르게 해산한다. 200석은 작고 예쁘게 들리는 숫자가 아니다. 이 시점부터는 거의 흉기다. 보고 싶은 사람과 검증하려는 사람을 동시에 찌른다.
D+6, 예매창 앞에서 사람이 작아지는 날
D+6 저녁, 사람들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음악이 어떻고 가사가 어떻고 브랜딩이 어떻고 하던 말들은 대기열 앞에서 가볍게 날아간다. 예매 버튼은 평등하지 않다. 새로고침을 몇 번 했는지, 손이 얼마나 빨랐는지, 서버가 누구를 덜 미워했는지에 따라 갈린다. 성공자는 자기가 팬이 아닌데 왜 성공했는지 변명하고, 실패자는 팬도 아닌 사람들이 검증하러 가겠다고 표를 먹었다고 욕한다. 모두 못났다. 그래서 정확하다.
공식은 과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건 꽤 중요한 선택이었다. 뜨거운 성원 같은 말을 넣었으면 바로 물렸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겸손한 척도 과하면 재수 없어진다. 포매터즈는 숫자와 사실만 올린다. 건조한 말은 상처를 덜 남긴다. 적어도 물어뜯을 면적이 작다.
D+7~D+8, 매진 소식이 새 유입을 데려오는 방식
표가 없다는 말은 이상하게 사람을 부른다. D+7과 D+8에는 뭔데 매진?이 새로 들어온다. 이미 듣던 사람들은 피곤해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너무 늦게 들어왔다고 억울해하고, 싫어하던 사람들은 200석 매진으로 인기 많은 척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자연스럽다. 숫자가 작으니까. 그런데 작다는 이유로 무시하려면 직접 들어봐야 한다. 그렇게 또 재생수가 오른다. 싸구려 승리처럼 보이지만, 시장은 원래 꽤 자주 싸구려로 움직인다.
D+8에는 팬 후보들이 직접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한다. 가사 카드, 곡별 추천, 입문자용 트랙 고르기, 보컬 구간 모음, 기타 들리는 초 추정. 공식보다 사적인 편집물이 더 잘 퍼지는 순간이 있다. 너무 빠르다고 비웃으면서도 저장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모순을 성실하게 실천한다.
D+9, 길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D+9쯤 되면 짧은 반응이 한 바퀴 돌고, 긴 글이 나온다. 블로그, 브런치, 음악 커뮤니티, 길게 이어진 X 스레드. 호평도 길어지고 비판도 길어진다. 이때 붙는 비판은 꽤 날카로워야 한다. 무조건 악플만 있으면 팀이 작아 보인다. 제대로 찌르는 글이 나와야 사람들도 이 밴드를 말할 만한 대상으로 본다. 플라스틱 밴드라는 욕도 이쯤에서 조금 더 정교해진다. 단순히 가짜라는 말이 아니라, 너무 깨끗하고 너무 컨셉이 촘촘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친 표면이 없다는 뜻으로 바뀐다.
D+10, 200명의 눈이 빚어지는 날
D+10부터는 쇼케이스에 가는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다. 그냥 공연 보러 가는 사람에서 갑자기 목격자가 된다. 후기 꼭 써 줘, Bleed 분위기 봐 줘, PBD 라이브 되는지 봐 줘, 고선우 기타 톤 들리면 알려 줘, 한준희 베이스 묻히는지 봐 줘. 바깥의 사람들이 임무를 준다. 성공자들은 부담스러워한다. 그 말이 맞다. 티켓 하나 잡았다고 갑자기 기자가 되는 건 억울하다. 그런데 쓰겠지. 인간은 억울해하면서도 꽤 자주 쓴다.
라이브 예상글도 늘어난다. Blue light는 첫 곡이면 안정적으로 열릴지, Pale Blue Dive는 보컬이 밀고 갈 수 있을지, Mercury는 현장에서 너무 가볍게 들리지는 않을지, Bleed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을지, Parallel은 처지면 위험하고 살면 고급스러울지, Midnight Space는 엔딩으로 버틸지. 사람들은 아직 공연을 보지 않았는데 이미 공연을 다 보고 있다. 상상은 늘 공짜라서 과격하다.
D+11, 라이브 못 하면 끝
D+11에는 말이 단순해진다. 라이브 못 하면 끝. 이 문장은 너무 무식해서 강하다. 글래시는 음원과 미감으로 관심을 얻었고, 그 관심 때문에 반대쪽은 가장 쉬운 심판문을 잡았다. 잘하면 인정. 못하면 조롱. 그 사이의 섬세한 사정은 대개 사람들에게 필요 없다. 작은 홀이라 보정이 덜 먹힐 것이고, 가까우니 손도 보일 것이고, 첫 공연이니 흔들릴 수도 있다. 대중은 그걸 알면서도 봐주지 않을 준비를 한다.
D+12, 별일 없어서 더 피곤한 날
D+12에는 공식이 조용했다. 리허설 사진도 없고, 멤버 스토리도 없고, 새 코멘트도 없었다. 보통이면 아무 일 없는 날인데, 아무 일 없는 날이 더 시끄러울 때가 있다. 같은 글이 또 올라오고, 어제 본 질문이 다시 뜨고, 팬 아닌데로 시작하는 문장이 열 번째쯤 보이면 사람들은 호감보다 피로를 먼저 말한다.
어제 본 글 또 올라옴글래시 얘기 너무 많아서 일부러 안 듣고 있었는데 이미 들음정리글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모르겠음팬 아닌데 이 말 이제 금지해라아직 팬 아닌 사람들의 단톡방 같은 거 있냐 왜 이렇게 많음
공식이 말이 없으니 빈칸은 커뮤니티가 채웠다. 대개 틀린 말로 채웠다. 어떤 사람은 쇼케가 내일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이미 끝난 줄 알았고, 어떤 사람은 고선우를 드러머라고 썼다. 댓글에서 세 명이 고쳐 줬다. 그중 한 명은 본인도 예매에 실패했다.
그날의 가장 현실적인 변화는 호감이 늘어난 게 아니라 반복이 늘어난 것이었다. 반복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동시에 검색창을 살려 둔다. 조용한 날은 홍보가 멈춘 날이 아니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조금 더 못생기게 다시 쓰는 날이었다.
D+13, 200명의 밤
쇼케이스 전날, 말은 좁아진다. 표 있는 사람은 길을 보고, 없는 사람은 후기 받을 자리를 만든다. 그날 밤 글래시는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았다. 동시에 너무 많은 걸 증명해야 하는 팀이 됐다. 200석짜리 작은 방이 인터넷에서는 거의 심문장처럼 보였다.
칭찬과 욕이 같은 곳으로 갔다. 음원 좋다, 그래서 라이브가 궁금하다. 너무 기획형이다, 그래서 라이브를 봐야 한다. 공연장 입구는 하나인데 각자 손에 든 의심은 다르다.
플라스틱 밴드라는 말도 완전히 나쁘기만 한 말은 아니었다. 독인데, 독은 가끔 방부제가 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신인은 이런 욕도 못 먹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제각기 내일을 준비했다.
표를 가진 사람은 길을 확인했고, 표가 없는 사람은 검색어를 저장했고, 커뮤니티는 후기 받을 글을 세웠고, 포매터즈 공식 계정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더 많은 말이 생겼다. 그날 밤 늦게 글래시 쇼케 후기, 원재경 라이브, 차규빈 드럼, 고선우 기타 같은 검색어가 작게 붙었다가 사라졌다. 대단한 순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못 간 사람들의 손가락이 같은 곳을 더듬고 있다는 증거로는 충분했다. 그 침묵을 지나 D+14가 온다. 그날의 객석은 응원석이면서 검문소다. 꽃다발보다 먼저 앉아 있는 건 호기심이고, 호기심보다 더 앞쪽에 앉아 있는 건 의심이다. 이제부터는 음원이 아니라 몸이 대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