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Flow
020
50번째 울타리
첫 페스티벌의 낮, 글래시는 낯선 관객 앞에서 웃고 걷고 긁으며 밴드의 사람 쪽을 처음으로 크게 연다.
스태프 패스는 검은 목줄에 걸려 있었다. 원재경은 그걸 손가락으로 한 번 돌렸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패스 뒷면이 흰 티 위에서 가볍게 뒤집혔다. 무대 뒤 임시 천막은 생각보다 낮았다.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 여섯 개, 아이스박스 두 개, 길게 늘어진 멀티탭, 반쯤 열린 기타 케이스, 바닥에 붙은 검정 테이프. 저 멀리 메인 스테이지에서 앞 팀 사운드 체크가 끝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이스가 한 번 낮게 지나갔고, 관객들이 웃었다. 낮 네 시 십이 분. 아직 해는 너무 당당했고, 바람은 악기 튜닝보다 조금 빠르게 지나갔다.
“선풍기 이쪽으로 좀 돌려 줘.”
윤다정이 노트북을 보며 말했다. 선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나한테 시켜.”
“니가 제일 가까워서.”
고선우는 아주 짧게 한숨을 쉬고 발끝으로 선풍기 방향을 밀었다. 선풍기는 덜컹거리며 돌아갔다. 바람이 윤다정 쪽으로 오기 전에 한준희의 머리카락을 먼저 건드렸다. 준희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저 지금 머리 망했어요?”
다정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원래 그래.
“그럼 괜찮은 거네요.”
“그런 뜻 아니야.”
원재경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너무 크게 웃은 건 아니었다.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가 눈이 따라왔다. 고선우가 그걸 봤다. 봤지만 아무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재즈마스터 스트랩 길이를 한 칸 더 조였다. Old Candy Apple Red는 낮빛 아래에서 무대 조명보다 더 노골적으로 빨갰다. 숨을 데가 없었다. 선우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조금 짜증날 만큼.
차규빈은 드럼 스틱을 양손으로 굴리고 있었다. 별것 아닌 동작처럼 보였지만, 끝이 같은 높이로 맞는지 확인하는 손이었다. 검정 나시 위로 어깨가 단단하게 잡혔다. 머리는 높게 묶었고, 몇 가닥이 목 뒤로 빠져 있었다. 스태프가 다가와 무대 전환 시간을 다시 말했다. 규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전환 7분이요?”
“네. 앞 팀 장비 빠지고 바로 올려 드릴게요.”
“모니터 먼저 주세요. 킥이랑 베이스.”
“네.”
“보컬은 재경이한테 바로 물어보세요. 오늘 바람 있어서.”
재경이 물병을 들고 있다가 눈을 들었다. 저 마셨어요.
규빈은 바로 봤다. 한 모금이잖아.
“보셨어요?”
“봤으니까 말하지.”
준희가 웃다가 자기 물병을 급히 뒤로 옮겼다. 다정이 그걸 봤다.
“준희야, 거기 장비 뒤야.”
“아, 네. 죄송합니다.”
“사과 말고 치워.”
“치웠습니다.”
“그건 치운 게 아니라 옆으로 민 거야.”
“아, 네. 이제 진짜 치웠습니다.”
고선우가 결국 피식 웃었다. 다정은 그 웃음을 봤는지 못 봤는지, 노트북 화면을 닫고 다시 열었다. 화면에는 Festival_Set_1600_final_final이라는 파일명이 떠 있었다. 준희가 그걸 보고 말했다.
“final이 두 개네요.”
“세 개면 문제고 두 개는 괜찮아.”
“기준이 되게 너그러우시네요.”
“너한테만 엄격한 거야.”
“아.”
원재경은 Telecaster를 케이스에서 꺼냈다. 올림픽 화이트 바디가 낮빛을 받자 조금 더 희게 떴다. 넥을 잡고 줄을 아주 작게 튕겼다. 깨끗한 소리. 아직 무대 스피커를 지나지 않은, 손에 가까운 소리였다. 고선우가 피크를 입술 사이에 물고 보다가 말했다.
“언니 피크 있어요?”
“있어.”
“지난번에 제 거 가져가셨잖아요.”
“그랬나?”
“네.”
“오늘은 안 가져갈게.”
“그 말도 지난번에 하셨어요.”
차규빈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 줘.
고선우는 바로 피크 하나를 꺼내 규빈 손바닥에 올렸다. 준희가 낮게 말했다.
“차규빈 프리패스.”
선우가 준희를 봤다. 넌 왜 또 그걸 말로 해.
“보여서요.”
“안 보이게 해.”
“제가요?”
“응.”
준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무대 쪽에서 스태프가 손을 들어 보였다. 앞 팀 장비가 빠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동하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페스티벌은 대기실에서도 객석이 멀지 않았다. 천막 바깥으로 햇빛이 들어왔고, 멀리서 누가 “글래시 곧이래” 하고 말하는 게 들렸다.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다섯 명 모두 알아들었다. 원재경은 기타 스트랩을 어깨에 걸었다.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카페 플리도, 검색창도, 과거 영상도 없었다. 그냥 햇빛, 먼지, 케이블, 무대.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글래시 대기해 주세요.”
준희가 베이스를 들고 일어났다. 흰 셔츠 아래 실버 체인이 햇빛에 아주 작게 번쩍였다. 귀의 작은 링들도 가까이 보아야 잡힐 만큼 얇았다. 다정이 그걸 보고 말했다.
“오늘 좀 많다?”
“뭐가요?”
“귀.”
준희는 자기 귀를 만졌다. 페벌이니까요.
“기준 이상하네.”
“오늘은 좀 그래도 되는 날 같아서요.”
고선우가 기타를 메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 다정은 선우를 봤다. 니 자존심도 오늘 좀 그래도 되는 날이야? 선우는 픽업 셀렉터를 만지며 대답했다. 오늘은 무대가 넓잖아. 원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선우는 그 말을 해 놓고도 후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손목을 한 번 풀고, 천막 밖으로 먼저 걸어 나갔다. 빨간 기타가 햇빛 쪽으로 나가자 더 붉어졌다. 그 뒤를 준희가 따랐다. 다정은 노트북 가방을 스태프에게 넘기고, 규빈은 스틱 끝을 한 번 맞췄다.
“가자.”
이번엔 모두가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공연장 뒤쪽 통로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누가 물 박스를 옮겼고, 누가 케이블 릴을 끌고 지나갔다. 스태프 한 명이 “죄송합니다” 하며 준희 옆을 비켜 갔고, 준희는 “괜찮아요” 하며 베이스 헤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재경은 무대 계단 앞에서 잠깐 멈췄다. 앞쪽에서 관객이 보였다. 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돗자리 접는 사람, 맥주컵을 든 사람, 친구 어깨에 팔을 걸친 사람,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린 사람, 양산을 접지 않은 사람. 그리고 앞줄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Room 02에서 봤던 사람들. 혹은 그랬다고 믿고 싶은 얼굴들.
재경은 마이크 쪽으로 걸어가며 웃었다. 밝게. 무대 밖에서 짓던 것과 다른 웃음이 아니었다. 다만 멀리까지 보일 만큼 컸다.
“안녕하세요. 글래시입니다.”
환호가 왔다. 예상보다 컸다. 고선우가 페달보드 위에 발을 올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앞줄에서 누군가 빨간 재즈마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선우는 그 사람과 눈이 맞았다. 아주 짧게. 그다음 입꼬리를 올렸다. 거의 도발처럼. 너 나 보지. 그 말은 기타로 대신한다.
Blue Light의 첫 음이 나왔다.
낮은 그 곡을 이상하게 돕고 있었다. Blue glass door가 조명 장치 없이도 떠올랐다. 원재경의 백금발은 바람에 한 번 얼굴 옆으로 흘렀고, 재경은 노래를 끊지 않은 채 손등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첫 줄은 Room 02보다 더 앞으로 나갔다. 작게 붙잡는 노래가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에게 닿게 던지는 노래였다. 차규빈은 드럼 뒤에서 처음부터 세게 가지 않았다. 박을 땅에 묻듯 놓고, 하이햇을 짧게 열었다. 윤다정의 신스는 야외 공기에서 너무 얇아지지 않았다. 낮빛 위에 푸른 막을 아주 얇게 세웠다. 한준희는 베이스를 평소보다 조금 더 몸으로 탔다. 다리를 크게 움직이진 않았지만, 어깨가 먼저 박자를 받아냈다.
후렴에서 앞줄 몇 명이 가사를 따라 불렀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재경은 그걸 봤다. 정말 봤다. “Stay in the blue light”를 부르던 사람이 입모양을 맞추는 순간, 재경은 마이크를 잡지 않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 엄지를 보였다. 아주 짧았다. 멋지다는 뜻. 잘하고 있다는 뜻. 관객 중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입을 막았다. 다른 한 명은 바로 친구 팔을 쳤다. 재경은 이미 다음 줄로 넘어가 있었다.
그 장면은 나중에 제일 먼저 올라왔다.
원재경 오늘 블루라이트 따라 부르는 관객 보고 엄지 보여 줌진짜 0.5초였는데 봤음봤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멋지다고 해 준 것 같아서 죽음
첫 곡이 끝났을 때 박수가 더 넓게 왔다. 앞에서만 터지는 소리가 아니라 뒤쪽까지 부풀었다. 재경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엔 진짜 한 모금보다 많았다. 규빈이 봤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더우시죠.”
객석에서 웃음이 났다. 재경도 웃었다.
“저희도요. 그래도 낮에 부르면 좋은 곡들이 있어서요.”
고선우가 마이크 밖에서 낮게 말했다. “있나?”
재경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있어.”
준희가 베이스를 고쳐 멨다. “다음 곡은 있죠.”
Mercury가 시작되자 뒤쪽 공기가 바뀌었다. 훅을 아는 사람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고, 모르는 사람들은 첫 M.E.R.-cury에서 고개를 들었다. 재경은 첫 M을 살짝 늦췄다. 관객 몇 명이 먼저 들어왔다가 웃었다. 재경도 웃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았다.
“아시네.”
그 말이 마이크를 타자 앞쪽에서 환호가 나왔다. 한준희는 베이스를 치며 웃었다. 윤다정은 짧은 신스 포인트를 넣고, 바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평소보다 길었다. 딱 한 박. 팬들은 그 한 박을 놓치지 않았다.
Mercury 중간에서 원재경은 뒤로 물러났다. 원래라면 보컬이 중심을 잡아야 할 자리였지만, 재경은 기타를 치며 한준희 쪽으로 반 걸음 갔다. 준희가 위쪽 라인을 넣는 구간이었다. 베이스가 갑자기 더 잘 보였다. 준희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고 손목을 조금 더 풀었다. 짧은 슬랩이 들어갔다. 너무 길지도, 너무 친절하지도 않았다. 근데 충분히 쫀득했다. 앞줄이 바로 반응했다. 뒤쪽에서 “오” 하는 소리가 퍼졌다.
준희는 웃으며 다시 한 발 뒤로 빠졌다. 나 보여 줬어요. 이제 곡 봐요. 그런 태도였다.
고선우는 그걸 보더니 Mercury 후반에서 자기 차례를 가져갔다. 아주 짧게. 오른손이 전보다 시원하게 내려갔고, 기타가 낮 공기를 가르듯 나갔다. 선우는 객석 오른쪽을 보며 웃었다. 이번엔 확실히 웃었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그 순간을 찍었다. 선우는 나중에 그 사진을 보고 “표정 왜 저래”라고 할 것이고, 다정은 “좋은데?”라고 할 것이고, 선우는 “니가 뭘 알아”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장은 할 것이다. 안 할 수가 없으니까.
Pale Blue Dive는 야외에서 더 컸다. Intro가 나오자 하늘이 곡 안으로 들어왔다. 원재경은 마이크 스탠드를 잡지 않고 걸었다. 무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너무 빠르지 않게. 날 붙잡아, 아니 나를 놔에서 손을 허공에 한 번 던졌다가 바로 접었다. 붙잡아 달라는 손도 아니고, 밀어내는 손도 아니었다. 관객은 그 애매한 손짓을 봤고, 각자 다르게 가져갔다.
차규빈은 이 곡에서 처음으로 살짝 보여 줬다. 두 번째 후렴 끝, 다음 마디로 넘어가기 직전, 원래보다 반 마디 더 빠르게 스네어를 감았다. 짧고 단단했다. 과시처럼 길게 끌지 않았다. 하지만 드러머를 보러 온 사람은 다 알았다. 저건 해도 되는 자리에 한 번 더 한 거다. 앞줄에서 누군가 “와” 하고 소리쳤다. 규빈은 표정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곡이 끝나고 스틱을 한 번 들어 보였다. 아주 낮게. 인사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고선우는 그걸 보며 말했다. 마이크에는 거의 안 잡혔다.
“오늘 쫌 치신다.”
규빈은 드럼 뒤에서 대답했다. 너도 해. 선우는 웃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았다. 기타 넥을 잡고 앞으로 나왔다. 다음 곡은 Bleed였다.
원재경은 물을 마시고 마이크 앞에 섰다. 햇빛은 아직 있었다. 그래서 더 웃겼다. 재경은 객석을 한 번 보고 말했다.
“이 곡은 낮에 하면 좀 이상한데요.”
관객이 웃었다. 재경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래도 할게요.”
웃음이 멎기도 전에 루프가 시작됐다. 어쿠스틱 톤의 기타가 마른 표면을 긁었다. 낮의 공원이 갑자기 벽이 있는 방처럼 바뀌지는 않았다. 그 대신, 밝은 곳에서 긁히는 소리가 훨씬 또렷해졌다. 재경은 낮게 말했다.
“bleed.”
윤다정의 아르페지오가 얇고 차갑게 올라왔다. 야외라서 흩어질 줄 알았던 소리가 생각보다 곧게 섰다. 다정은 그걸 듣자마자 알았다. 됐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알았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준희가 그걸 봤다. 곡 중인데도 봤다. 나중에 말하지는 않았다. 다정이 싫어할 테니까.
Bleed 후렴에서 재경의 목이 거칠어졌다. 예쁘게 밀지 않았다. can you hear what I sound like에서 자음이 앞쪽으로 박혔다. 관객은 처음엔 움직이지 못했다. 낮인데도, 아니 낮이라서 더 노골적이었다. 고선우는 그 옆에서 리프를 던졌다. 이번엔 닫힌 방에서 이를 드러내는 기타가 아니었다. 열린 곳에서 한 번에 긁고 지나가는 기타였다. 선우는 객석을 봤다. 더 이상 확인이 아니었다. 들었지. 그 표정이었다.
한준희의 베이스는 아래에서 몸을 당겼다. 한 번 더 짧은 슬랩이 들어갔다. 아주 잠깐. 하지만 그 순간 뒤쪽에서 서 있던 사람들이 몸을 움직였다. 처음 보는 사람도 저역은 이해가 빨랐다. 머리보다 허리가 먼저 알아듣는 게 베이스라니, 아주 불공평한 악기였다.
Parallel로 넘어가기 전, 다섯 명은 잠깐 숨을 골랐다. 페벌은 시간이 빡빡했지만, 숨 고를 정도의 틈은 있었다. 재경이 다음 곡용 피크를 주머니에서 찾다가 빈손을 확인했다. 선우가 한숨과 함께 하나를 건넸다. 그때 드럼 마이크에 규빈의 목소리가 살짝 걸렸다.
“이름 써.”
앞줄이 들었다. 웃음이 번졌다. 재경은 피크를 받아 들고 관객 쪽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어쩌라고요, 와 죄송합니다, 사이 어디쯤의 동작이었다. 그 두 마디는 그날 밤 내내 잘려 돌아다니게 된다.
원재경은 객석을 봤다. 앞줄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고, 중간쯤에는 조금 전부터 서 있던 낯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친구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 검색 결과일 것이다. glassh(our). 괄호가 있는 이름. 재경은 그걸 보고 웃었다.
“처음 보시는 분들도 꽤 있으시죠.”
손이 몇 개 올라왔다. 생각보다 많았다. 준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우는 “많네” 하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다정은 패치를 바꾸며 말했다.
“좋네.”
재경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기까지는 저희가 조금 시끄러웠고요.”
규빈이 드럼 뒤에서 아주 작게 웃었다. 재경이 이어 말했다.
“이번엔 좀 걸어 볼게요.”
Parallel은 햇빛 아래서 이상하게 잘 맞았다. 흰 울타리, 초록, 맨발, 느린 걸음. 페벌 잔디와 너무 맞아서 오히려 조금 민망할 정도였다. 관객은 방금 전 Bleed에서 긴장했던 몸을 조금 풀었다. 돗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들었다. 준희의 베이스는 곡을 걷게 했다. 이번엔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다정은 신스를 부드럽게 두었다. 너무 예쁘게 만들지는 않았다. 바깥의 초록이 이미 충분했으니까.
원재경은 walk me in, slow에서 객석을 보지 않았다. 대신 무대 바깥을 향해 조금 걸었다. 안전선 직전에서 멈췄다. 스태프가 본능적으로 한 발 움직였고, 바로 멈췄다. 재경은 선을 넘지 않았다. 넘어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그 앞까지 갔을 뿐이다. 팬들은 또 그걸 가져갈 것이다. 어디까지 가는지 아는 사람. 거기서 멈추는 사람. 그러나 오늘은 그 문장보다 더 단순한 말이 먼저 나올지도 몰랐다. 원재경 다리 길다. 무대 걸어 다니는 거 미쳤다. 뭐, 사실 그런 말도 필요하다. 사람은 너무 깊은 해석만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마지막은 Midnight Space였다. 아직 밤은 아니었다. 해는 기울었지만, 하늘은 밝았다. 그래서 곡 제목이 조금 어긋나 보였다. 재경은 그 어긋남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마지막 곡입니다.”
객석에서 아쉬운 소리가 나왔다. 재경은 웃었다.
“저희 시간 칼같이 지켜야 해서요.”
준희가 뒤에서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관객이 웃었다. 다정은 준희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선우는 그걸 보고 피크를 다시 쥐었다. 규빈은 이미 카운트할 준비를 끝냈다.
Midnight Space는 낮 끝자락에서 더 이상했다. 다정의 신스가 위로 올라가지 않고 옆으로 퍼졌다. 준희는 한 박 늦게 들어왔다. 선우는 거의 놓듯이 쳤다. 규빈은 크게 치지 않았다. 재경은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앞에서 목을 긁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이상할 정도였지만, 무대 위에서는 이상하지 않았다.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not gone, just wide
그 줄에서 바람이 왔다. 재경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렸다. 재경은 그대로 불렀다. 얼굴이 반쯤 가려졌는데도, 목소리는 더 잘 보였다. 아니,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선명했다. 관객 쪽이 조용해졌다. 페벌에서 조용해지는 건 어렵다. 근처 무대 소리, 사람들 말, 컵 부딪히는 소리, 바람, 전부가 끼어든다. 그런데 그 몇 초는 이상하게 비었다.
곡이 끝났다. 박수가 왔다. 환호도 왔다. 하지만 처음엔 아주 짧은 틈이 있었다. 사람들이 끝났다는 걸 확인하는 틈. 글래시는 그 틈을 건드리지 않았다. 재경은 마이크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다섯 명이 앞으로 나왔다.
원재경은 가운데에 섰지만, 반 발 뒤로 물러났다. 고선우는 왼쪽에서 기타를 들고 있었고, 웃고 있었다. 진짜로. 차규빈은 스틱을 한 손에 모아 낮게 들었고, 윤다정은 손을 작게 흔들었다. 생각보다 어색하게. 한준희는 제일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가, 객석 오른쪽에도 따로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또 환호가 났다.
재경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에 또 봐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아까보다 더 환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였다.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선우가 먼저 말했다.
“더워.”
“근데 재밌었어요.”
“그건 맞아.”
다정이 노트북 가방을 받으며 말했다. 신스 안 날아갔어. 재경이 물었다. 잘 들렸어?
“응. 뒤쪽까지 갔을걸요.”
규빈은 스틱을 가방에 넣었다. 첫 페벌치고 괜찮았어. 준희가 바로 말했다. 칭찬이에요? 응.
“너무 짧아요.”
“충분해.”
고선우는 기타 케이스를 닫으려다 멈췄다. 객석 쪽에서 아직 누군가 “글래시!” 하고 부르고 있었다. 선우는 돌아보지 않으려다가, 결국 돌아봤다. 손을 크게 흔들지는 않았다. 피크 든 손을 아주 작게 들어 보였다. 앞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선우는 이번엔 웃었다.
“뭐야.”
“너 오늘 되게 잘 웃네.”
선우가 케이스를 닫았다. 잠금쇠 소리가 났다.
“날씨 좋아서.”
“구라.”
“야.”
“맞잖아.”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재경은 물병을 들고 그 둘을 보다가 웃었다. 차규빈은 스태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고, 준희는 지나가던 스태프에게 “수고하셨습니다”를 두 번 말했다. 한국어 한 번, 영어로 한 번. 습관처럼.
무대 앞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는 다음 팀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검색했다. 누군가는 방금 찍은 사진을 확대했고, 누군가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까 그 밴드 좋더라.”
그 말은 작았다. 너무 작아서 멤버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말은 원래 멀리서 시작해서 천천히 온다. 지금은 낮이었고, 소리는 충분히 선명했다.
그날 저녁부터 타임라인은 어휘력을 잃었다.
진짜 너무 좋다 "좋다" 말고 더 있어야 하는데 없음 그냥 좋음 어휘력 페벌 잔디에 두고 옴원재경 목소리 너무 좋다 맑은데 안 가벼워 웃으면서 부르는데 안 쉬워 이거 뭐임 뭐긴 뭐야 원재경임Blue Light 첫 줄 나오는데 옆 사람이 와 했음 나도 속으로 와 했는데 밖으로는 욕 나옴 어휘가 먼저 죽었습니다가사마다 사람이 바뀌는 느낌임 Blue Light에서는 햇빛 Bleed에서는 쇳가루 Midnight Space에서는 갑자기 베개 됨 나 지금 대체 뭘 들은 거냐근데 오늘 원재경보다 더 충격인 점: 고선우가 웃음 한준희가 슬랩함 차규빈이 필인으로 내 심장 가격함 윤다정이 0.3초 웃음 글래시 사람 너무 많음
엄지 클립은 잘리자마자 인용이 붙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죽이지저 따봉 의미: 1. 잘하고 있어 2. 들었어 3. 너 거기 있는 거 알아 4. 이제 죽어엄지 보여준 것도 좋은데 그다음 바로 표정 싹 바꾸고 노래 들어가는 게 진짜 사람 미치게 함 팬은 쓰러지는데 본인은 근무 중저거 보고 내가 따라 부른 것도 아닌데 괜히 칭찬받은 기분 듦 도둑 칭찬 달달하다
“그래도 할게요” 클립에는 계보가 붙었다.
Room 02: 그냥 할게요페벌: 그래도 할게요다음엔 뭐냐해야죠 이러면 나 죽음Bleed는 낮에 하면 이상하다고 직접 말해놓고 그 낮에 제일 잘 어울리게 만들어 버림 인성 문제 있음
별명도 하루 만에 여러 개 태어났다. 대부분 구렸다. 구려서 살아남았다.
머글 쪽은 훨씬 단순하게 들어왔다. 그게 더 무서웠다.
오늘 친구 따라 페벌 갔다가 글래시 봤는데 원재경 목소리 좋더라 밴드 음악 잘 안 듣는데 이건 저장함빨간 기타 치는 분 누구예요? 웃는 거 너무 좋던데아까 흰 베이스 치던 분 이름 뭔지 아시는 분 그 슬랩? 그거 좋았음키보드 치는 분 카메라 좀 더 잡아 줬으면 소리가 좋았는데 얼굴은 잘 못 봄글래시 그 괄호 있는 팀 맞죠? 마지막 곡 좋았는데 제목 아시는 분
밤이 되자 주접은 문장이 됐다.
원재경 목소리는 낮에 들으면 더 못 피한다고선우는 야외에서 자기 이름을 기타로 썼다차규빈은 드럼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다 보고 있었다윤다정은 웃는 것보다 소리 안 날아가게 하는 게 더 다정하다한준희는 베이스가 뒤에 있다는 편견을 흰 셔츠 입고 부쉈다글래시는 오늘 사람으로 들렸다
하루의 흐름은 결국 아홉 단계로 정리됐다. 원재경 목소리 너무 좋다, 근데 고선우 오늘 왜 이렇게 웃음, 한준희 베이스 뭐임, 차규빈 드럼 뒤에서 다 보고 있었네, 윤다정 웃었다, 글래시 생각보다 밴드였음, 다음 단공 언제임, 티켓팅 어떡함, 망함.
그리고 그날의 제일 날것의 문장은 이거였다.
원재경 목소리 좋다고 보러 갔는데 고선우 웃고 한준희 슬랩하고 차규빈 필인 넣고 윤다정 입꼬리 올라가서 그냥 밴드 하나 통째로 들고 옴
이거면 됐다. 첫 페벌은 그렇게 지나갔다. 울타리는 이제 하나가 아니었다. 낮의 잔디밭에서 쉰 개쯤의 울타리가 동시에 열렸다. 각자 다른 문으로 들어와서, 같은 무대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