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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VIGI World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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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Can I Be A Savage

낭만이라는 건 대개 불시착에서 시작된다.

낭만이라는 건 대개 불시착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에 뚝 떨어졌던 어린 왕자와 예기치 않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하차했던 셀린이 그랬듯이. 줌 살짝 당기자면,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얼결에 북한 땅을 밟은 윤세리도 그랬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어디

흐를지 알 수 없는 청춘이 우리를 꼭 멋진 장면에 데려다 줄 거라고 믿었다. 아마, 그날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지하.

연습실 한복판에 한 여자가 섰다. 어깨에는 손때 묻은 악기 케이스 대신, 각 잡힌 서류 가방이 매달려 있다. 누가 봐도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어 보인다. 3년을 동거동락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장내로 옅은 습기가 배어든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먹먹한 공기가 폐부를 치고 들어온다. 곰팡이 냄새와 낡은 카펫이 흩뿌리는 먼지 냄새. 그 중심으로 빛무리가 떨어진다. 앰프에서는 미세한 노이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직, 지이잉. 이윽고, 퉁. 마이크 놓는 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옆에 있던 멤버들 어깨가 움칠 떨렸다. 끊임없이 고막을 찌르는 전기음에도 누구 하나 입 뗄 기색이 없다. 짝다리를 짚은 여자 하나가 손에 쥔 드럼 스틱을 세게 움켜쥔다. 그럴 때마다 손바닥에 배인 굳은살이 욱신거렸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한 밴드가 흔들리는 광경을 맨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야, 솔직히 말해 봐. 김민정.”

“뭘?“

“너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1년? 3년?”

왜? 꺾이지 않는 현실 때문에. 민정은 이 밴드의 기둥 같은 사람이다. 서류 가방을 맨 여자가 맞은편에 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 기다란 숨을 들이쉬느라 양쪽 어깨가 딸려올라간다. 그리고 툭 하고 대번에 떨어진다. 뱉는 숨은 짧았다. 이 사람은, 지금 서 있는 모두와 3년을 동고동락한 키보드 세션, 세미다. 회사로 치면, 스타트 멤버. 마른 손으로 제 눈가를 쓸어내린 세미가 운을 뗐다. 내가 무슨 주제로 화내냐고?

“몰라서 물어?“

“언니, 그만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어? 평생 꿈만 뜯어먹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세미가 민정의 손에 들린 스틱을 훑었다.

“취미. 그래, 돈 빠지고 체력 빠지는 취미로 하면 되잖아. 남들도 다 그러고 살아. 그런데 왜 나를 배신자로 만드는 건데. 니가 말했지? 틀린 삶은 없다고.”

민정이 입술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비릿한 쇠맛이 혀끝에 맴돈다. 배회하던 시선이 세미의 왼손으로 가 닿는다. 케이스티파이 뒷판에 새겨진 그래피티 아트가 눈에 들어왔다. 새비지. 나름, 라이브 씬을 주름잡고 있는 이 밴드의 이름이다. 경계 새, 날 비, 알 지. 경계를 넘자고 만든 이름인데, 경계는커녕 현실의 벽도 못 넘는 꼴이라니.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제라도 현실을 살아.”

꿈에서 나오라고. 그 말을 끝으로, 철문 닫히는 소리가 사방을 묵직하게 때려 놓았다. 쿵 하는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 심장까지 흔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닫힌 문 너머의 구두굽 소리를 우두커니 듣고 섰다. 민정이 스네어 드럼 위로 엎질러진 침묵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라도 현실을 살라고? 이게 내 현실이야. 내가 지키고, 내가 사랑해야 할, 내 현실.

그게 벌써, 3개월 전 일이었다.

# How Can I Be A Savage

“다음.”

건조한 음성이 떨어진다. 연습실 바닥으로 구겨진 이력서들이 굴러다녔다. 드럼 의자에 앉은 민정이 지친 듯 고개를 뒤꺾었다. 아…….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 오늘 진짜 존망종합세트네. 우리 밴드 입지 이거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괜찮은 애가 이렇게 없냐. 뭐 좀 괜찮다 싶으면 절거나, 보이싱이 안 되거나, 악보 없이 못 치거나. 까고 말해, 속상하다. 멤버 하나가 난처한 듯 미간을 짚었다. 한숨만 폭폭 쉬는 게, 곧 땅이라도 꺼뜨리겠다. 옆에서 골몰하는 애, 얘는 인혜다. 이 밴드의 프론트맨. 제법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민정아, 쟤가 오늘 마지막이야. 이번에도 까면 우리 진짜 답 없다. 다음 달 클럽 오디션 어떡할 건데.”

“못하는 걸 못한다고 하지, 그럼 어떡해. 박자 절고 센스 없는 애 데려다 앉혀 놓으면, 걔 뒤치다꺼리는 누가 하는데?”

내가 해? 드럼 치면서? 민정이 신경질적으로 스네어 드럼의 러그를 조였다. 끼익, 끼익. 튜닝 키 돌아가는 소리가 장내를 가른다. 지금의 새비지는 세미가 나간 뒤로 꼭 이빨 빠진 호랑이 꼴 같다. 멜로디를 채울 건반이 비니, 사운드가 확 빈다. 그 공란을 채우려니, 급하게 구한 객원들이 빡빡한 기준을 못 메웠다. 정승처럼 버티고 선 인간 메트로놈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지. 김민정 기준은 아무나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연습량이 모자라면 귀신같이 일갈하는 매의 눈이시다. 하나같이 그 기세에 나가떨어진 거다. 거의, 뭐, 줄줄이 비엔나로. 그렇다고 멤버들이 어깃장을 맬 수도 없다.

민정은 대개 맞는 말을 골라 했다.

“아니, 그래도 이번에는 좀 다르대. 아는 사람이 소개해 줬는데, 클래식 하던 애라 기본기는 좋다던데.”

“클래식?”

바쁘던 손이 우뚝 멎는다. 쥐고 있던 튜닝 키를 바닥에 대충 내던졌다.

“여기가 무슨 예술의 전당이냐. 홍대 바닥에 웬 클래식.”

“악보는 볼 줄 알겠네. 일단 들어나 보자. 야, 들어오라 그래!”

인혜의 신호에 육중한 방음문이 개방된다. 끼이익. 경첩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그렇게 열린 틈 사이로, 어떤 이질적인 것이 걸어들어온다. 곰팡내 나는 지하 연습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짜진짜 이질적인 것. 이게 무슨 공기지. 단정한 코트 하며, 정갈하게 주차된 이목구비 하며……. 음. 천지가 개벽해도 탈선과는 거리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저 맹한 표정. 저 김밥 빼앗긴 수달 같은 얼굴 뭐야. 조심스럽게 입장한 면접자가 사파리에 잘못 떨어진 아기 수달처럼 쭈뼛댔다. 사위를 둘러보는 눈동자가 꽤 불안하게 흔들린다. 민정은 인혜 쪽으로 고개만 쳤다. 뭐야? 말 없이 입만 뻥긋뻥긋. 잘못 온 거 아니야? 도리도리. 몰라.

“안녕하세요…….”

“이름이?“

“유지민입니다. 클래식 피아노 전공했구요.”

민정은 이력서 훑을 생각일랑 벌써 접은 채다. 반쯤 체념한 눈으로 걔 쪽을 빤히 보고 있다. 사방이 꽉 막힌 방음 보스 연습실에 은은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끼어들었다. 꽤나 물과 기름 같은 그림이다. 제법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걔가 제 눈가를 긁적거렸다. 그렇게 벌어진 공기 사이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어찬다. 뭐야? 개예뻐. 주연이 일렉기타 스트랩을 조절하며 기웃댔다. 얌전히 베이스를 안고 있던 도영도 마찬가지. 민정의 작은 골통 뒤로 이런저런 감탄이 포개어진다. 마스크가 좋다느니, 인상은 괜찮다느니. 들린다. 민정 언니 심사 번잡해지는 소리. 이러나저러나 우리 밴드 드럼은 전신으로 기합 싣는 대신, 기함하고 넘어가셨다.

지민은 두 눈을 스타카토로 깜빡거렸다. 날카롭기로 정평난 두 눈에 싹싹 발리는 기분이라. 양쪽 입술을 감쳐 물고 눈만 끔뻑끔뻑. 긴장으로 입술이 퍼석해졌다. 스툴에 대충 걸터앉은 인혜가 민정 쪽을 슬며시 훑었다. 쟤 또 얼굴로 으름장 놓네. 아닌 게 아니라, 훈장님 저리 가라인 미간으로 볼 장 다 본 수준이다. 밴드가 장난인 줄 아나. 어디, 곱게 자란 전공생이 호기심에 기웃거려? 뭐, 그런 표정.

“거기 앉아.”

“넵.”

민정이 턱짓으로 건반 자리를 가리켰다. 손가락에 물집 한번 안 잡혀 봤을 것 같은 고운 손이 쪼오금 거슬린다. 쭈뼛거리던 애가 신디사이저 앞에 앉았다. 전신 스캔 한번 때려 보니, 얼씨구, 나이도 그렇게 안 많아 보여. 차분하게 의자 높이를 조절하고, 건반과 무릎 사이의 거리를 잰다. 민정은 일련의 동작들이 지나치게 정석적이라고 느껴졌다. 두 눈이 가늘어진다. 뭐가 문제냐? 그 지나치게 정석적인 것이 거슬리는 거다. 허리 꼿꼿하게 세우는 록 밴드 키보디스트랑 좀 다르잖아. 유지민은 꼭, 콩쿠르 심사위원 앞에 앉은 수험생 같았다.

“뭐 칠까요? 악보…… 혹시 있을까요?”

“악보 없어. 우리 곡 아직 안 나왔으니까.”

초견이 좋은가 보네. 민정은 스틱 끝으로 하이햇을 챙, 챙 건드렸다. 쇠끼리 부딪치는 차가운 소리에 지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너 원래 하던 거 해 봐. 네? 준비한 거 말고. 니가 원래 치던 거. 제일 자신 있는 거 쳐 보라고. 지민의 동공이 허공을 한 바퀴 돈다. 잠시 버퍼링이 걸리더니, 뭐라도 결심한 듯 짧게 심호흡했다. 열 손가락이 스르르 건반 위로 얹힌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첫 타건.

연습실의 공기가 확 술렁거린다. 쇼팽이다. 개중에서도 손맛 제대로 타는 난곡. 신디사이저 건반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가 떠올랐다가. 걔는 생면부지의 낯선 타건감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왼손 도약, 오른손 속주. 죄다 기계처럼 일정하고 칼 같다. 한 음도 뭉개 놓지 않은 완벽한 연주였다. 그러니까, 악보를 통째로 삼킨 사람이 보여 줄 수 있는 오차 범위 0%의 연주.

……미련하게 연습만 했네.

민정은 팔짱을 낀 채, 지민의 등 뒤를 째렸다. 잘한다. 어디에서 이름깨나 날렸을 법하고. 디테일 챙기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루브라고는 쥐뿔도 없다는 게 문제지. 보는 사람을 베니 그린으로 만드는 칼연주다. 무슨 말이냐면, 너는 지금 전혀 스윙 하고 있지 않잖아. 밴드 음악에 필요한 끈적한 필이나 즉흥적인 맛이 전무하다. 그만큼 숨 막히게 정확하고 딱딱한 연주. 다르게 말하면, 그게 멤버들에게 정답만을 강요하는 연주가 될 수도 있었다. 민정의 고개가 비스듬히 틀어졌다. 그런데 거슬리지 않는 게 희한하달까. 오히려, 그 무식할 정도의 정확함이 민정의 강박적 리듬감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걸 인지하고 나니,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근성은 나쁘지 않은데.

마지막 화음이 쏟아진 뒤, 지민의 양손이 허공에서 멈춰 섰다. 잠깐의 정적. 지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쪽 어깨를 가늘게 들썩였다. 먼지 낀 조명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저거, 김민정 눈치 살피는 거다. 갈색 눈동자에 불안과 기대가 뒤섞여 있다.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민정에게 쏠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도영이 인혜의 낯빛을 훑는다. 거기에, 주연은 양쪽 어깨만 훌쩍 들었다가 놓는다. 이 집 보컬이 어쩐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인다. 도르르. 다시 시선이 지민에게로. 그렇게 수 초가 흘렀다. 민정이 쥐고 있던 스틱을 드럼 위에 툭, 던져 놓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다. 그저 건조한 입술을 떼어 짧게 내뱉었다.

“나쁘지 않네.”

그 짧은 한 마디가 허공에 흩어진다. 수달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도영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들썩거렸다. 저거, 김민정 기준으로 극찬인데. 이제 막 이 바닥 처음 딛는 애답다. 그런 걸 알 턱이 있나. 기대감으로 빛나던 동공이 순식간에 반사광을 지워냈다. 누가 봐도 시무룩하다. 나쁘지 않아? 그러면 좋지도 않다는 건가? 수달, 아니, 유지민은 인생사 첫 혹평을 들은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입을 비죽비죽.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 인혜가 웃었다.

사실상, 별로라는 말을 돌려 뱉거나 예의상 주는 낙제점아닌가? 지민이 혼자 입만 달싹대는 사이, 민정은 미련 없다는 듯 드럼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미 볼일 끝났으니 나가보라는 듯한 등이다.

“분위기 왜 이래. 민정이가 말을 저렇게 해서 그렇지, 저거 엄청 칭찬이야!”

보컬 인혜가 황급히 지민의 등을 두드리며 수습에 나섰다.

“지난주에 온 애는 스틱 날아갈 뻔했어. 나쁘지 않다는 건 합격이라는 거거든? 어. 야, 합격! 환영한다! 우리 이제 건반 생긴 거지?”

“네? 제가요?”

“네, 니가요.”

“가, 감사합니다.”

와아. 키 엄청 크시다……. 지민은 170을 훌쩍 넘긴 인혜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명치 끝이 묵직했다. 이딴 게…… 오디션? 이딴 게 합격 인사? 적어도 수백 대 일을 뚫은 거라고 봤는데. 그런데도 전혀 환영받지 못한 기분이다.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서운함이 먼저 차오른다. 이래서는 그냥, 길 잃고 골목 잘못 들어간 사람 같잖아. 불현듯 두 눈이 또렷해진다. 맞다. 나 진짜 잘못 들어간 적 있었지. 밀려드는 머쓱함에 검지로 뺨만 갉작댄다. 잠시 숨을 고르고 연습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본다. 그제서야 여기저기에서 부스럭대는 멤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새비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명망 있는 여성 밴드. 인디 씬에서는 제법 알아준다고 들었다. 정신 차리자. 돈 주고도 못 들어오는 곳이야. 지민은 멋쩍음도 잊고 가파르게 호흡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자자, 구경 났어? 연습 안 해?”

한번 맞춰 보자. 민정이 스틱으로 스네어 림을 탁, 탁 내리쳤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잡담 금지라는 으름장을 대신한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끝날 줄은 몰랐는데. 뭐가 일어나기는 일어났구나 싶은 멤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간다. 익숙하게 악기를 챙겨, 스탠바이.

“너 악보 다 외운다며.”

“네? 아, 네. 한 번 들으면 대충은 해요.”

“그럼 바로 가자. A키 1-6-4-5 루프. 8마디 잼 가자.”

민정이 스틱을 돌리며 무심하게 뱉었다. 아, 즉흥 앙상블을 하자는 건가? 지민은 너무 한낮에 벌어진 잼에 정신이 혼미했다. A-D-Bm7-E7 진행. 머리 굴린답시고 가만 앉아 있는데, 신디사이저 액정으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든다. 아차. 얼른 두 손을 건반에 얹었다. 습기 때문인지, 건반 표면이 약간 끈적거렸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습관처럼 손을 푼다. 데엥. 디잉. 코드 두어 개를 짚더니, 양손을 교차해 낮은 라부터 높은 라까지 훑고 올라간다. 멤버들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양손에 꽂혔다. 야, 손 돌아가는 거 봐. 장난 아닌데. 주연이 슬쩍 혼잣말하자, 민정이 미간을 조프렸다. 마지막 텐션 화음까지 꾹꾹 눌러 참아 기다리는 게 제법 다정하시다. 그리고는 심벌을 챙, 건드린다. 흐름이 정돈됐다.

“됐지. 우리 리사이틀 할 거 아니니까 손 그만 풀고.”

“네.”

톤 좀 깎자. 약간 깡깡거리는 느낌 나게. 아, 네, 잠시만요.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 지민이 서둘러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톤부터 잡아야 해. 어떻게 해야 하지? 헤매는 지민을 보며 다른 멤버들까지 덩달아 긴장한 눈치. 애 잡네, 잡아. 평소 같으면 안 그러겠는데, 지금 무드가 딱, 저 거친 수달과 그걸 지켜보는 나라서. 분명 괜찮은 재목인데. 기대 어린 눈빛이 쏟아진다. 마이크를 쥔 채 팔짱 낀 인혜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놀아 보자는데, 잘 놀아야지. 허겁지겁. 이제 10초 지났다. 지민이 겨우 톤을 맞추자, 민정이 턱끝으로 신호했다.

“들어간다.”

네? 제가요? 여기에서요? 갑자기? 원, 투. 민정은 지민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카운트를 셌다. 잠시, 잠시만요. 원, 투, 쓰리, 포. 드럼 비트가 시작됐다. 하이햇이 비트를 쪼갰다. 그 소리를 따라 심장이 쿵, 칫, 타, 치. 민정의 킥 드럼이 바닥까지 울려 놓는 것 같다. 밴드 음악은 낯설지만 채우는 건 자신 있어서. 좋아. 기교 없이 정석적으로 접근해 본다. 낯선 세계에 불시착한 수달이 다음 전략을 정했다. 채우기. 건반의 역할은 그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뭔가 보여 줘야 된다. 지민은 배운 대로 첫 화음을 짚었다. 정직하고 풍성한 교과서적 접근으로. 그러면 모로 가도 틀리지는 않을 테니까.

챙. 민정이 심벌을 움켜쥐었다. 세 마디도 못 채우고 브레이크.

기교 다 빼고 코드만 잡아.

4분 음표로.

쿵, 쿵, 쿵, 쿵.

정박에 하나씩.

그걸 들은 지민이 제 귀를 의심했다. 코드만, 4분 음표, 정박. 순식간에 개괄된 키워드가 눈물 쏙 빠지게 매섭다. 그러면 이제 막 바이엘 들어가는 애들이 할 법한 연주인데. 전공생에 리사이틀 돌고, 쇼팽 치던 손으로 생짜배기 정박을 찍으라니. 지민은 애써 지운 교수님들 얼굴이 떠올라 약간 울고 싶어졌다. 시작부터 혼나는 게, 첫 단추를 영 잘못 끼운 것 아닌가 싶어서. 하다 못해, 아무 교회 들어가서 반주만 하겠다고 해도 이보다 나을 것만 같다. 울망울망한 눈의 지민이 머뭇거렸다. 그 단순한 걸 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건데. 심드렁한 눈의 민정이 자비 없이 읊조렸다.

“못 하겠으면 가. 짐 싸도 안 말려.”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이런 식으로 한두 번 혼나 본 게 아닌데도 사석에서 이러니 울컥한다. 민정은 그게 너무 상심한 수달 같다는 생각이나 한다. 얼굴은 조막만 해 가지고. 지민이 입술을 감쳐 문다. 지금 울면, 진짜 어린애 취급 받고 쫓겨나겠지. 다른 멤버들은 좌불안석으로 눈치만 살핀다. 이러다가 또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고. 눈만 그렇지, 아무도 끼어들지 못했다. 이 연습실의 절대적인 지휘자는 김민정이니까. 잠시 마가 떴다. 할게요. 지민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담백한 카운트가 이어진다. 원, 투, 쓰리, 포. 그러다가 또 스톱. 이번에는 다섯 마디까지 갔다. 성과가 있다.

“야.”

“네?”

“음 길게 가져가지 마. 경쾌하게 가기로 했잖아.”

경쾌하게 가기로 했잖아. 그 말에 외마디 탄식이 새어나갔다. 평생을 독무대만 섰던 지민이 밴드맨의 언어를 알 턱 있나. 민정이 스틱 끄트머리로 건반을 가리켰다. 페달 떼고, 음 딱딱 끊으라고. 뒷박에 힘줘서 챳, 챳, 소리 나게. 손으로 뮤트를 걸어 놓고 있던 주연이 두 눈을 홉뜬다. 흠. 되게 맞춰 주네. 그래도 같이 갈 생각은 있나 보다. 잠시 일어섰던 인혜가 도로 스툴을 당겨 앉았다. 판 길어진다 싶으면 앉는 게 능사다. 지민은 그동안 쓸데없는 텐션 좀 넣지 말라며 한사코 혼이 났다. 태어나서 너무 잘 친다고 혼나 보기는 또 처음이다. 지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목전에 플래처 교수 얼굴이 동동 떠다니는 걸 겨우 지워냈다. 아니야. 이 사람은 새비지야. 고개를 절레절레.

다시, 카운트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손가락 끝에 힘을 뺀다. 챳, 챳, 챳, 챳. 계속 딱딱 끊어지게. 그러자, 신기하게도 민정의 드럼 소리 사이사이에 음이 감기는 거다. 우와. 아까는 죄다 따로 놀기 바빴는데. 지금은 민정이 깔아 준 레드카펫 위를 건반이 뛰어다니는 것 같다. 민정의 고개가 조금씩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지민의 두 눈이 휘둥그래진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맛이다. 맞춰 간다는 건 이런 걸 뜻하는구나. 어쩐지, 새파란 하늘 아래를 드라이브하는 기분. 뒤편에서 생수를 넘겨 내던 도영이 플라스틱 병을 내려놓았다. 연습실 안 공기가 면접 때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거기에서 싱코 조금만 섞어 봐. 내가 킥 때릴 때 반 박자씩만 당겨서.”

그러자, 드럼이 살살 화려해지기 시작한다. 스틱이 스네어 드럼의 테두리를 때리며 날카롭게 울렸다. 지민은 그 박자를 쫓느라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아요 상태. 와, 정신없어. 단순한 진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민정의 리드를 따라가니 야생마에 올라탄 것 같다. 슬슬 고양감이 차오른다. 완벽하게 통제된 악보의 세계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상대의 스틱 끝과 눈빛에 반응해야 하는 날것의 세계가 밀어닥친다. 지민의 손끝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이상하게 눈가가 데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섞이기 위해 맞추는 호흡은 무서우리만치 낯선 것이었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한줌의 해방감이 있다.

민정의 드럼이 파도처럼 밀고 들어온다. 지민이 물러선 공간을 킥과 스네어가 단단하게 채웠다. 건반이 뼈대만 남기고 빠지자, 그제야 다른 악기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베이스의 울림, 기타의 날카로운 리프,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드럼의 소리. 지민의 연주가 밋밋해진 만큼, 밴드의 소리는 날로 선명해졌다. 그 누구도 연주를 끊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박자를 쪼갠다. 지금을 즐기고 있다는 아주 미세한 신호다. 주연의 표정이 한결 느긋해졌다.

민정이 웃는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무아지경의 합주가 막을 내렸다. 지민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여지껏 건반 위를 노닐던 양손이 낯설게 느껴진다. 손끝은 찌릿찌릿. 기분은…… 무슨 기분이지? 분하고 억울한데, 심장은 터질 것 같은 게 이상했다. 그럴 동안, 민정이 스틱을 내려놓으며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참 태연하다. 이게 리더의 무게라는 걸까. 왕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그를 방증하듯, 민정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무심하게 덧붙였다. 아까보다 낫네.

“내일 2시까지 와. 늦지 말고.”

지민이 멍하니 건반 위에 올려진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나중에 안 건데,

모르기는 몰라도, 이 수달,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았던 게 아장아장 걸어다닐 아기 때였다고 한다. 걔가 듣는 말은 언제나 극단적 찬사 아니면 침묵이었다나. 천재, 신동, 뭐, 손가락에 신들렸다 같은 말들. 그런데 열심히 쳤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나쁘지 않다면 시무룩할 만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민정과 좀 귀엽지 않냐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쟤 마스크를 보라고. 가르쳐서 데리고 가자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금요일 밤의 홍대로 떨어진다. 여기가 얼마나 정신없는 곳인지 감이 오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골목마다 민원더러 물처럼 밀려오라며 볼륨 키우는 거기. 베이스 센 곡만 골라다가 쿵, 쿵, 가슴팍 울려 대며 멀미 유발에 진심인 거기. 그 홍대 바닥에서 음악 좀 듣는다는 놈들은 다 모인다는 성지가 있다. 라이브 클럽, 어비스라고. 새비지는 그 클럽에서 꽤나 입지 있는 밴드 중 하나다. 당장 도쿄 돔 털어서 팔자 고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름 있는 편이니까. 대기실 문이 열린다. 아, 좀 비켜라. 맨앞에 앞장서서 들어오던 인혜가 손사래를 쳤다.

“냐심까.”

“예에.”

그 뒤에는 새카만 후디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 민정이 뒤따랐다. 아무렇게나 둘러멘 가방을 구석 자리 던져 놓는다. 소파 깊숙이 몸부터 파묻는 게 제법 익숙한 본새다. 김민정 고정 자리 맞다. 여럿이 인사치레를 나누느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진다. 아, 시끄러워. 민정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바지춤을 더듬었다. 제 손에 따악 맞는 아이폰이 불쑥 나왔다.

“아주, 고정석이셔.”

“탐내냐. 내 자리야.”

기타를 맨 주연이 웃었다. 지민은 그 낯선 풍경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클래식 대기실의 고상한 침묵이나 우아한 견제와는 좀 다른 공기가 있다. 가령, 땀 냄새라든지 헤어 스프레이 냄새 같은 것들. 그리고…… 묘한 흥분이 뒤섞인 날것의 냄새. 사람 사는 냄새. 왜, 헬스장에도 그런 공기 있지 않나? 조금 다른 종류지만 어쨌든 그것과 조금 비슷한 에너지가 있었다. 지민이 심호흡했다. 극도로 정제된 공기만 맡아 봤다 보니, 아주, 별천지가 따로 없어서. 아기 수달에게는 이 모든 풍경이 로망이고 꿈 같았다. 여기가 진짜 밴드들이 사는 세상이구나. 모든 게 생경한, 리터럴리 신삥의 눈이 빛났다. 쭈뼛거리던 지민이 민정 쪽의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만 슬쩍 걸친다. 그러자, 먼저 자리했던 민정이 다리를 꼬며 옆으로 비켰다. 귀찮다는 듯한 얼굴은 덤. 그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을 건조한 음성이 메웠다.

“야.”

“네, 네?”

“어차피 리허설 다 해. 쫄지 마.”

“아, 네. 안 쫄아요.”

“안 쫄기는. 손 떠는 거 다 보이는데.”

민정이 눈짓으로 지민의 무릎 위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틀려도 돼. 죽자고 덤비지 말고, 즐겨. 여기 콩쿠르장 아니니까.”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놀아. 열심히만 하지 말고.”

“새비지, 사운드 체크 할게요!”

앗, 네! 엔지니어의 외침에 무대 조명이 켜졌다. 지민이 벌떡 일어섰다. 붉은색 핀 조명이 드럼 세트를 비춘다. 손에 쥔 스틱을 가볍게 돌리던 민정이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대기실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김민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 사이사이를 검붉게 그을린 스틱이 휙휙 돌아가며 스쳤다. 저거 무겁던데. 안 그렇게 생겨서, 되게 묵직했던 기억이 있다. 쉬는 시간에 괜히 한번 만져 봤다가 무게감만 느꼈지. 저 언니가 자꾸 뭘 돌리는 건 개인기가 아니라, 습관이고. 처음 오디션 볼 당시에는, 실수하는 즉시 날아올 것 같은 위압감이 있었다. 그게 내 머리가 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은 든든한 우리 편 대포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무대 위에 선 민정은 평소 이상으로 존재감이 컸다.

“킥 좀 더 줘요. 모니터 안 들려.”

“오케이, 확인.”

사운드가 조율된다. 둥, 둥.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킥 소리 위에 기타 리프가 날카롭게 얹혔다. 베이스가 합세해 무대 바닥을 묵직하게 긁어낸다. 지민도 조심스레 건반을 눌러 톤을 확인했다. 연습실 앰프와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음압이다. 다행히 첫 리허설은 이렇다 할 잡음 없이 무난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신입치고 제법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그래도 처음이라고 긴장을 하기는 했고. 십 분, 이십 분……. 대기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점점 본 공연과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진짜 관객들이 온다. 밴드 멤버로서 처음 마주하는 관객들.

무대 위의 모든 빛이 차츰 사그라들었다.

찰나였던 암전이 지속된다. 지민은 건반 위에 놓인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어둠을 뚫고 민정의 스틱이 허공을 가른다. 그 등판을 멍하니 응시했다. 마르고 작아 보이는 체구다.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신기한 사람이다. 그 생각을 끝으로 무대 앞을 훑었다. 쨍하게 떨어지는 빛, 거물거물하게 맺힌 관객들의 이목구비. 늘 봐 오던 장면임에도 하나같이 낯설다. 의자도 새빨갛지 않고, 어디 무슨 홀도 아니고, 사람이 그만큼 많은 것도 아니지만……. 지민은 낯선 꿈에 놓여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에 쑥 먹혔다. 어수선하던 소리가 잦아든다. 모든 소리가 등 뒤 저편으로 멀어졌다. 오로지 우리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민정이 곁눈질한다. 멤버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민정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원, 투, 원 투 쓰리 포.

인혜의 허밍을 시작으로 지민의 연주가 시작됐다. 그 뒤로 기타 소리 올라오고, 베이스 들어오고, 드럼 소리 땅. 와……. 연습실에서 듣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출력 앰프를 타고 증폭된 드럼 소리가 등뼈를 타고 자르르. 이게 소름이 돋는 건지, 전율이 흐르는 건지. 죽어라 외워 왔던 새비지의 시그니처 곡이 일 분, 이 분, 차곡차곡 쌓여 간다. 지민은 시간이 갈수록 손끝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리드미컬한 곡에 어깨가 절로 들썩거렸다. 각 잡힌 클래식 호흡 말고. 나오는 대로 까닥거려도 되는, 그런 호흡. 두 곡쯤 들어가자 민정의 머리카락으로 땀이 스몄다. 두 번째는 어떻게 치나 싶을 정도로 빠른 곡이다. 그런데도 여유로운 낯빛으로 심벌을 내려치는 게 제법 근사하다.

저 사람, 인간 메트로놈이라는 별명답게 박자 하나는 칼이다.

멋있다. 지민은 열심히 건반을 누르다가도 이따금 탄성을 삼켰다. 제가 치는 건 고작 정박 코드인데. 저 언니 드럼 위에 얹히니까 그것조차 웅장한 음악이 돼서. 거기에 베이스 들어오고, 일렉 들어오고. 너무 멋지지 않나? 세상이 막, 너무 나를 위한 공간 같지 않나. 두 눈을 예쁘게 접은 지민이 기분 좋게 웃었다. 민정은 지민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대지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주를 가른 니 손길. 그 가사를 따라 목전으로 은하수가 떠다녔다.

두 번째 곡이 슬슬 클라이맥스를 향해 간다. BPM이 살살 오르막을 탄다. 민정의 스틱이 슬로 모션으로 여럿의 잔상을 만들듯 보인다. 베이스와 기타는 한 결 어긋남 없이 짝짝 달라붙었다. 인혜의 허스키하면서도 풍성한 보이스가 전신을 감싸듯 울린다. 완벽해. 나 지금 진짜 잘하고 있어. 무의식적으로 민정의 두 눈을 좇는다. 보고 있죠? 저 지금 잘하고 있죠?

그때다.

틱.

미세하게 어긋난 소리가 지나갔다. 앰프 소리에 묻혀 누구도 듣지 못할 불협화음이. 스틱의 팁이 하이햇 모서리를 아주 살짝 빗겨 맞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일순간 리듬이 밀렸다. 탈선한 건 아니라 한순간 툭 어긋난 것 뿐이지만. 일반 관객은커녕, 멤버들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넘어가도 아무 문제 없는, 먼지 같은 거. 지민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어?

지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드럼 쪽을 보았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민정과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물게 흔들리는 동공이 보인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두 시선이 얽혔다. 소음이 차단된다. 세상에 둘만 남은 것 같은 기묘한 정적. 민정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씨발……. 완벽해 보이던 성벽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누가 알아챈 게 싫었던 걸까. 민정은 금방 인상을 구기며 드럼을 내리쳤다. 아까보다 더 정확하고, 더 독하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신중의 신중을 기하는 것이 피부로 와 닿는다.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연주가 끝났다. 객석의 스태프들과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미친. 찢었다.”

멤버들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만족한 눈치다.

“야, 오늘 느낌 좋은데? 민정이 컨디션 개좋고.”

“…….”

지민은 웃다가도 말 없이 민정의 스틱 끝을 훑었다. 그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신경 쓰여서. 민정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거칠게 땀을 닦고 지민을 스쳐 지나간다. 끝나고 잠깐 봐. 들릴 듯 말 듯 작은 속삭임이 곁에 남는다.

저 잡혀 가나요. 체포 영장 받는 건가요.

무대가 막을 내리고, 약속된 시간을 모두 채웠을 즈음이다. 이제 건반 정리가 조금 익숙해진 지민이 케이블을 조심조심 뽑았다. 페달을 챙기고, 스탠드를 접고. 다른 악기들이야 케이스에 넣으면 그만이라. 그때까지도 열심히 드럼을 해체 중인 민정의 머리통을 구경했다. 나는 드럼에 비하면 양반이구나.

“제가 할 건 없을까요?”

“괜찮아.”

뭐라도 돕고 싶으나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퇴짜 맞았다. 그런 민정은 저 작은 몸으로 혼자 심벌 나사 풀고, 스네어 챙기고. 페달까지 야무지게 분리 중인 모습을 보며 속으로만 탄식했다. 와. 바쁘다. 했다고 끝이 아니구나.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멤버들도 장비들을 챙기느라 여념없다. 지민은 홀가분한 어깨와 달리 마음 한편이 내내 찝찝했다. 원래 이렇게 다 끝나면 차갑나? 정산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그런 생각이나 했던 것 같다. 무대 바깥의 시간을 쏜살같이 지나갔다. 어느새 장비를 모두 싣고, 클럽 사장님을 조우한다. 차량 안에 온갖 장비와 악기를 야무지게 쌓고 나니 허기가 좀 든다. 밥 먹고 싶은데……. 지민은 사장님과 대화하는 멤버들로부터 두 발자국쯤 떨어져 있었다. 막내는 얌전히 있는 게 미덕이니까. 정산까지 마치면, 진짜 사회생활 시작이다.

“어디 가지? 아웃닭?”

“야, 사람 많아. 동네로 빠지자.”

“합정에 뭐 새로 생겼다던데.”

봐 봐. 선배들이 머리를 맞댔다. 지민이한테 뭐 맛있는 거라도 먹여야 하지 않겠냐며. 신입 끼고도 잘 끝냈으니 축하할 일이라나. 민정아, 갈 거지? 어깨의 백을 둘러매던 인혜가 물었다. 그랬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나 급한 일 있어서. 너희끼리 가. 담백하게 대꾸한 민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걷는다. 엥. 잠시만요. 허망한 얼굴의 지민이 주린 속을 움키고 뒤쫓았다. 저, 죄송해요. 민정 언니한테 뭐 받아야 할 게 있어서! 얼른 따라가려는데, 의아한 낯빛의 주연이 스친다. 아차. 헐레벌떡 뛰어가던 지민이 냅다 돌아와 악보 가방을 챙겨 든다. 잘 가, 뒤풀이야. 잘 있어, 내 야식아.

성큼성큼. 뭐가 그렇게 급한지, 민정의 뒤는 따라도 따라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홍대 골목은 여전히 시끄럽다. 빨빨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조용한 골목 어귀로 입성해 있다. 그 길을 빠져나가니, 미리 맡아 둔 자리처럼 한적한 길이 드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번호판을 훑는 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끝나고 좀 보자면서 이러는 게 어디에 있어. 지민이 울상을 했다. 어, 언니, 어디 가요?

“망원동이요. 작업실.”

택시 안으로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민정은 팔짱을 끼고 창밖만 응시했다. 차창에 비친 얼굴은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창백한 것 같기도 하고. 지민은 무릎 위에 놓인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까 쳐다봐서? 아니면 그 실수를 알아챈 게 기분 나빠서?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슬쩍 훔친 얼굴이, 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 같아 보여서.

두 사람은 또 다시 지하 연습실 앞에 떨어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멤버들 웃음소리가 섞여 있던 곳인데. 지금은 제습기 돌아가는 소리만 이따금 울렸다. 너무 적막하다. 잔뜩 침잠한 얼굴의 민정이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팽개치듯 놓았다. 그리고는 곧장 드럼 세트 앞으로 직행.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코트도 안 벗고.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지민이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막 와도 되는 건가. 허기는 차치하고, 이렇게 주먹구구여도 되나 싶다.

“문 잠가.”

그게 민정이 뱉은 첫마디였다. 철컥. 도어락 잠그는 소리가 나자마자 드럼 스틱이 허공을 가른다. 투다닥, 쿵. 투다닥, 쿵. 필-인이다. 아까 두 번째 곡에서 민정이 티도 안 나게 삐끗했던 구간. 코스모라는 곡이다. 이 곡은 진짜 빨라서 따라 하는 시늉도 못 한다. 민정은 그걸 말도 없이 갈기듯 치기 시작했다. 지민은 우두커니 선 채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뭘 보여 주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반복이 거듭된다. 반복의 반복이 거듭된다. 다시 시작. 또 똑같은 연주. 또 연주. 다시. 다시. 다시다시다시.

   투다닥, 쿵.

“아니야.”

 투다닥, 쿵.

“틀렸어.”

  투다닥, 쿵.

“씹.”

짜증 나. 민정의 입술이 비틀렸다. 마치 드럼 가죽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스틱을 내리꽂았다. 어깨 근육이 경직되고, 목에는 시퍼런 핏대가 섰다. 지민은 문가에 선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연주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같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완벽함 속의 티끌 하나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그걸 알기 전까지는 분명 정상적인 비트로 들렸다. 누가 봐도 손색 없을 연주인데. 그때, 민정이 짧은 욕설과 함께 심벌을 후려쳤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린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그 마디. 다시. 다시. 다시.

지민은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콩쿠르를 앞두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내 모습. 틀리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달리던……. 지민은 문득 울고 싶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랫입술을 감쳐 문 민정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이 언니도…… 무서운 거구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게 눈에 들어갔으면 따가울 법도 한데. 이 지독한 정승은 눈 한 번 깜빡대지 않고 요지부동이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붉은 자국이 선명하다. 그러더니, 빡.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왼손에 들려 있던 스틱이 튀어올랐다. 다그락, 다그락……. 스틱이 바닥을 굴렀다. 얼어붙은 지민이 침음했다. 드디어 드럼 소리가 멈췄다. 거친 숨소리만이 연습실을 가득 채운다. 맞닿은 민정은 한참이나 멍하니 제 왼손만 내려다보고 있다. 화가 난 거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도 계속 칠 만큼. 지민은 그 감정의 영 남의 것 같지가 않아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언니, 피 나요.”

뒤늦게 따라붙은 지민이 민정의 왼손을 이리저리 확인한다. 엄지와 검지 사이, 굳은살이 박인 자리로 빨간 피가 배어나왔다. 툭. 스네어 드럼의 하얀 헤드 위로 붉은 점이 수놓아진다. 됐어. 놔 봐. 민정이 몸을 굽힌다. 바닥에 떨어진 스틱을 주우려는 순간, 쑥. 시야에 하얀 손 하나가 들이친다. 다시 고개가 들렸다. 지민이 발치의 스틱을 주워 들고 있었다. 피 묻은 스틱. 눈가가 아프게 일그러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징그러워하거나 놀라 소리쳤을 텐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도리어 민정을 챙겼다.

“뭐 해. 안 비켜?”

안 비켰다. 그저, 두 발을 땅에 꽂은 듯 물러서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지민은 스틱을 건네주지 않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납작해진 튜브형 핸드 크림이다. 그리고 한참이나 가방을 뒤적거렸다. 유지민, 뭐 하는데. 민정은 무언가 불안한 듯 그 동그란 머리통을 응시했다. 그 위로 날카로운 언사가 차곡차곡 얹혀 간다. 나 스틱 막 만지는 거 싫어해. 야. 빨리 달라니까. 그렇게 채근하자 돌아온 건, 루피 반창고 하나다. 이게 뭐야? 민정이 손목을 붙들렸다. 화들짝 놀라 빼내려는데,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둘은 정말, 요상한 힘싸움을 했다.

“이러면 더 못 쳐요.”

“니가 무슨 상관…….”

“감염돼요. 쇠독 오르고. 그러면 일주일은 스틱 못 잡아요. 오늘만 연습할 거 아니잖아요.”

“아니, 그냥 내가 치는 거나, 아, 따가.”

상처 부위로 소독 티슈가 얹혔다. 그걸 꾹 누른 건 감정 실은 게 아니고, 지혈하려고. 편편하던 미간이 일순 우그러든다. 독종이라도 통증은 어쩔 도리가 없다. 지민은 익숙한 손길로 피를 닦아냈다. 흡사, 많이 다쳐 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연고를 펴 바른다. 그 위에 분홍색 루피 반창고를 감아 주면, 됐다. 응급처치 완료.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기에는 상처 다루는 솜씨가 너무 능숙하다. 수 없이 깨지고 터져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 그런 익숙함이 있다.

“저 다 봤어요.”

“뭘?”

“아까 리허설 때 하이햇 밀린 거.”

그래서 데리고 온 거잖아요. 맞게 치는 거 보라고. 민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던데요. 저만 들었어요. 시선이 맞닿는다. 조롱도, 동정도 없는 눈이다. 그저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 같다. 정적이 흘렀다.

“딱 몇 초였는데, 그거.”

“야.”

“금방 제자리 찾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훔쳐봤고.

지민이 포개어 잡았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아 준다. 루피 반창고가 투박한 손 위에 훈장처럼 감겨 있었다. 맞물린 입은 벌어질 기미가 없다. 원래 김민정 같았으면 건방지게, 니가 뭘 알아 같은 소리를 기어코 냈을 거다. 그런데도 말 없이 발밑만 응시한다. 화끈거려야 할 상처 부위가 묘하게 시원하다. 가슴팍에서 웬 맥동이 느껴진다. 심장은 원래 뛰지. 그런데 이렇게 세게 뛰는 게 이상하지 않나. 한참이나 침묵하던 민정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귀끝이 살짝 홧홧하다. 그제서야 고개가 들린다.

시선이 얽혔다. 어, 잠깐만.

“그러니까 그만 치면 안 돼요?”

“야, 너 울어?”

“속상한데 어떡해요.”

“아, 안 칠게, 안 칠게. 어?”

민정이 엄지로 눈가를 훑어 준다. 고맙다는 뜻과 동의어였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새벽 2시의 망원동은 호젓했다. 하루 웬종일 비까지 뿌리고. 민정이 편의점 봉투를 덜그럭거리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지하 연습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눅눅한 냄새가 훅 끼친다. 춥다, 추워. 신발장 맨 아래 칸에 발을 넣어 가며 대충 벗어 둔다. 슬리퍼를 꿰어 신는데, 기척이라고는 쥐뿔도 없어야 할 연습실에 웬 불빛이 있는 거다. 고개가 기울렸다. 또 배인혜인가. 민정이 쥐고 있던 비닐 봉투를 두어번 감아 타이트하게 당겼다. 이러면 소리가 좀 덜 날 것 같아서.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자, 빗소리를 타고 피아노 선율이 들려온다.

딩, 딩, 딩.

화려한 기교도, 웅장한 화음도 없는 아주 단순한 소리. 슬쩍 고개를 치드니, 헤드셋을 목에 걸친 지민이 살짝살짝 엿보였다. 건반 위에 코 박고 뭐 하는 거야. 한 손으로는 악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같은 음을 눌렀다가, 뗐다가. 민정이 질색했다. 개미련하네. 누구 닮아 가지고……. 맞다. 그 누구가 지금, 문가에 기대선 채 지민의 등판을 보고 있다. 괜스레 멋쩍어진 민정이 제 머리통을 긁었다. 반창고 사건 이후로 나흘쯤 됐나. 걔는 연습벌레라는 말조차 부족할 만큼 연습실에 세를 냈다. 원래 그 타이틀 내 건데. 어쩌지.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발만 달싹대던 민정이 드디어 기척을 낸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민이 벌떡 일어난다. 어지간히 놀랐다.

“어? 언니! 가신 거 아니었어요?”

“가방 놓고 갔어. 너 안 가냐?”

“아, 저…… 여기 마디가 자꾸 손에 안 붙어서요. 이것만 하고 가려고요.”

눈밑이 퀭하다. 민정이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캔 커피 하나를 건반 위에 툭.

“마시고 해. 손 떨지 말고.”

“감사합니다.”

지민이 커피를 받아 들며 웃었다. 뭐 저렇게 웃어, 사람 간지럽게. 민정은 짐짓 인상을 구기며 드럼 세트 뒤로 넘어갔다. 가방만 챙겨서 나갈 생각이라. 지민은 다시 종전의 마디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솔, 라, 시, 도…… 레, 미. 음과 음 사이가 불안하다. 박자가 틀린 건 아닌데. 기계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어느 한 구석이 허전하다. 걷고는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애처럼.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민정이 의자에 앉았다. 스틱 케이스가 가볍게 열린다. 오늘은 평소에 쓰던 묵직한 놈 대신, 철사 가닥이 촘촘하게 달린 와이어 브러쉬. 뭐 할 거냐고?

차르륵, 차르륵.

브러쉬가 스네어 드럼의 표면을 쓸었다.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빗소리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마찰음이 건반 소리 밑으로 깔린다. 지민이 어깨를 움칠 떤다. 돌아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거기에 으름장 한번 놓아 주고 만다. 보지 마.

“앞만 봐.”

쿵, 차악. 쿵, 차악. 드럼이 건반을 밀어 주기 시작했다. 강압적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다. 망설이는 지점에서는 기다려 준다. 달려 나가야 할 곳에서는 등을 떠밀어 주는 섬세한 반주.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뒤에서 민정이 버티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쭈뼛거리던 선율이 점차 과감해졌다. 브러쉬 소리가 건반의 빈 공간을 따스하게 메웠다. 말 한마디 없는 합주가 이루어진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서로의 호흡을 읽으면서.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연습실 공기가 한껏 부드럽게 느껴졌다. 지민은 그제서야 천천히 의자를 돌릴 줄 알았다. 이제 되겠지, 하는 얼굴.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다.

“언니.”

“왜.”

“진짜, 치아키 선배 같아요.”

“뭐?”

민정이 브러쉬를 정리하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또 그놈의 치아키 타령.

“그게 누구인데 자꾸 걔 같대? 니 전 남친이냐?”

“네? 아뇨! 아, 진짜 모르시는구나.”

대박.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세상 심각하던 전쟁 영화 매니아 김민정이 순정 만화 남주인공 취급이라니. 이런 건 본인이 몰라서 가능한 거다. 한국인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며……. 푸하하. 새비지 막내는 천지가 개벽해도 이 사실만은 누설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얼른 네이버에 접속하는 민정이 조금 귀엽게 느껴진 것도 같다.

“지휘자예요, 지휘자. 엄청 멋있는 사람 있는데…… 언니랑 성격도 똑같아요.”

“어떤데.”

“맨날 화내고 소리 지르는데, 결국에는 다 챙겨 줘요.”

“내가 맨날 화내고 소리질러?”

“아무래도.”

“그리고 내가 언제 다 챙겨 줬는데.”

“이거 봐. 말하는 것도 똑같아.”

지민이 건반 의자를 끌어당겨 민정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저는 언니 드럼이 좋아요.”

“…….”

“학교 다닐 때에는 메트로놈만 보고 쳤거든요. 틀리면 안 되니까. 그런데 언니 드럼은 틀려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요. 여기서 넘어져도 뒤에서 받아 줄 테니까, 그냥 달리라고.”

민정이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시선은 저기 멀리, 먼 산으로 가 계신다. 유지민은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재주가 있다. 손발은 니가 마는데, 왜 빈맥은 내 몫.

“착각하지 마. 틀리면 얄짤 없다. 아까도 브릿지에서 달리더만.”

“헤헤. 흥분해서…….”

“웃지 마. 정들어.”

이제는 안다. 저 날 선 말투 속에 숨겨진 온도를.

“내일 영화 보러 갈래요?”

“뭐?”

“주연 언니가 표 줬어요. 버리기 아깝잖아요.”

지민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티켓 두 장을 꺼내 흔들었다.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

“……너 나 놀리지.”

“왜요? 이거 평점 나쁘지 않아요! 약간 뮤지컬 무드래요.”

“나보고 애들 틈에 껴서 저걸 보라고? 죽어도 안 가.”

“아, 가요! 제가 팝콘 살게요. 캐러멜.”

아, 진짜. 왜 이래. 지민이 두터운 후디의 소매를 잡고 흔든다. 수달 같은 눈망울이 간절하게 빛났다. 반창고 감아 주던 때랑 왜 이렇게 달라. 그때에는 의젓했는데. 말려들지 말자고 다짐하면 말려들게 되어 있다. 어차피 나는 그 극장에 가게 될 것이다.

“팝콘 반반이다.”

“네?”

“카라멜 반, 어니언 반. 아니면 안 가.”

지민의 해밝게 웃었다. 아싸. 민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러면서도 철없이 방방 뛰는 게 꼭 싫지만은 않다. 웃음 앞에 헛을 달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웃고 만다. 한겨울 같던 연습실에 차츰차츰 봄이 스미고 있었다. 아주 이상하고, 시끄럽고, 요상한 봄이.

일요일 오후의 멀티플렉스 로비는 키즈 카페를 방불케 붐볐다. 사방에서 아이들의 비명과 웃음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울려 퍼졌다. 그 한복판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김민정이 있다. 음. 조금 멀미 나는 것 같기도. 제가 영화 보러 왔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없다. 문제는 손에 들린 거다. 알록달록, 원색 캐릭터로 도배된 짱구 콤보 팝콘 통. 이게 문제다. 민정은 오만 색채를 다 빼앗아 간 팝콘 통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색채 옮겨 붙는 것도 아니면서. 쩝. 저어기 멀리, 지민이 인파를 뚫고 나온다. 손에는 콜라 두 잔. 해맑게 웃는 얼굴이 주변의 풍경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졌다.

“와, 진짜 사 주실 줄 몰랐는데. 감동이에요.”

“조용히 해. 아는 척하지 마.”

“왜요? 귀여운데.”

지민이 팝콘 통을 받아들며 웃었다. 뭐쩌라구. 대답은 후드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는 걸로 대신했다. 홍대 바닥에서 새비지 리더 김민정이 짱구 팝콘 통을 들고 서 있는다? 진짜, 소문 나면 혀 깨물고 드럼 스틱 꺾는다. 민정은 씨알도 안 먹힐 다짐을 자꾸만 덧대고 있다. 낙장불입이라는 말도 모르나. 당연히 모른다.

“들어가자. 불 꺼지면 바로 잘 거야. 깨우지 마.”

“에이, 돈 아깝게 왜 자요. 초반 10분이 진짜 중요한데.”

지민은 광고 타임 내내 쉴 새 없이 팝콘을 집어 먹었다. 바스락. 다람쥐가 도토리 까 먹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부스럭대는 게 민정의 귓가를 내내 간지럽혔다. 그럴수록 팔짱을 끼고 스크린만 노려본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 유치찬란한 애니메이션따위, 10분도 안 돼서 잠들 자신 있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쯤 지났나. 예상과는 달리 한숨도 못 잔 민정이 탄식했다. 훌쩍, 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지민을 본다. 왜, 뭔데? 옆자리 기척이 너무 거슬린다.

또 훌쩍.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스크린에서 반사된 희미한 빛이 지민의 얼굴로 쏟아진다. 음. 지금 우는 거야? 그것도 어깨까지 들썩거리면서? 당황한 민정이 스크린을 재차 확인했다. 뭐야? 짱구와 친구들이 악당한테 쫓기며 엉덩이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아니, 도대체 저기의 어디가 슬픔 포인트라는 거야? 미치겠네.

“야, 너 우냐?”

“아니, 짱구가 막, 친구들을.”

“돌겠네.”

일단 주머니를 뒤적거려 본다. 휴지따위 있을 리 만무하지 않나. 안 되는데. 유지민의 눈물, 콧물이 비싼 후디 소매를 다 적시기 직전이다. 어떻게 하지. 민정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후드 소매를 지민의 얼굴에 쑥 들이밀었다. 이거 써.

“감사함니다…….”

걔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소매에 눈가를 찍었다. 축축한 감촉이 손목에 스몄다. 그래도 의리상, 팔은 안으로 굽는다. 우리 애니까. 그 어둠 속에서 훌쩍거리는 애를 보고 있자니, 기가 막히는 거다. 참 묘한 감정이 든다. 무대 위에서는 쇼팽 때려 부수던 애가, 지금은 짱구 보고 운다고?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엇박자도 이런 엇박자가 없지. 민정은 결국, 영화 내용을 단 한톨도 못 남기고 나왔다. 옆에서 울다가, 웃다가, 팝콘 씹는 유지민 구경하느라.

영화관을 빠져나오자 어스름한 저녁이 둘을 반겼다. 유지민은 어찌나 오열을 했는지, 아주 퉁퉁 부어 계신다. 그래 놓고 한다는 말이,

“아, 진짜 명작이었다. 그쵸.”

“어, 그래. 니 눈 보니까 명작 맞나 보다.”

민정이 맥 빠지게 웃었다. 괜시리 목이 탔다. 오늘 같은 날이면 뇌 빼도 괜찮을 것만 같고.

“술 마실래?”

“아, 완전 좋죠. 저 술 잘 마셔요.”

어이구, 그러셔. 두 사람은 기세 좋게 골목 구석의 낡은 이자카야를 택했다. 시끌벅적한 대로변과 달리,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가게. 도란도란 말 섞기에는 이만 한 데가 없다. 민정의 아지트 같은 곳이기도 했다. 지민이 여기저기 둘러보는 사이, 하이볼 두 잔이 목전에 놓였다. 그 뒤로는 꼬치구이 대령이요. 언니. 왜. 아까 영화관에서 휴지 없어서 소매 내준 거, 좀 설렜어요. 혼자 두기 좀 그래서 준 거야. 민정이 꼬치에서 고기를 빼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지민은 맞닿은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빨대로 하이볼을 휘저으며 두 눈 끔뻑. 언니. 또 왜.

“언니는 저 왜 뽑았어요?”

“잘 쳐서.”

“거짓말. 저 그때 제멋대로 쳤잖아요. 언니가 다 빼라고 화내 놓고.”

“그러니까. 제멋대로 쳐서.”

민정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탄산이 목을 따갑게 긁고 내려갔다.

“잘 치는 애들은 많아. 널린 게 전공생이고 세션이야. 그런데 걔네는 재미없어. 그냥 기계 같거든.”

“…….”

“그런데 너는, 기계처럼 치는데 뭔가 좀 억울해 보였달까.”

“제가요?”

민정의 시선이 지민의 손에 머물렀다. 길고 하얀 손가락. 그 안에 숨겨진 수많은 연습량과, 억눌린 무언가. 소리 지르고 싶은데 참는 것 같았어. 악보에 갇혀서. 그래서 뽑은 거야. 한번 터뜨려 보라고. 지민은 어떤 말도 보태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정곡을 찔린 거다. 클래식이라는 정해진 틀, 교수님의 평가, 주변 시선. 그 숨 막히는 수조 안에서는 언제나 숨 참고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민정은 그 수조를 깨부수게 해 준 거다. 니 마음대로 해 봐, 하면서. 달달하고 쓴 액체가 목 뒤로 넘어간다. 지민이 제 속을 꺼내 내보였다. 저는 언니가 부러웠어요.

“무대 위에서 언니는 진짜 자유로워 보였거든요. 누구 눈치도 안 보고, 그냥 언니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자유는 무슨. 나도 먹고살려고 발악하는 거지.”

“언니 모르죠. 제가 언니 드럼 치는 거 처음 들었을 때 어땠는지.”

젖은 눈이다. 너는 그게 짱구 보고 운 뒤에 할 말이니. 민정이 제 목덜미를 갉작였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눈에 호흡이 차분해졌다. 진득한 동경이 담긴 눈이라면 맞겠다. 그대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차하면 내프킨이라도 뽑아 건네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 지민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갔다. 되게 숨 트이는 거예요. 아, 음악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틀려도 되고, 부숴져도 되고, 그냥 미친듯이 달리면 되는 거구나. 지민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민정의 손등 위에 말간 손가락 끝이 살짝 닿았다.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언니처럼 되고 싶어서.”

테이블 위의 공기가 순간 멈췄다. 주변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한참이나 곱씹어 본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딱 사람 같은 체온. 민정이 턱을 괴었다. 그동안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을 상기한다.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혹은 그저 겉멋으로 스쳤던 인연들. 개중에 단 한 명도 너처럼 되고 싶다는 말은 뱉지 않았다. 그래, 다 자기 삶 사는 거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민정이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싣는다. 목구멍이 뜨겁다.

“……취했다, 너.”

“안 취했거든요. 멀쩡해요.”

“가자. 내일 합주 있어.”

민정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마주 앉았던 지민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언니가 일어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 일어나야지. 뒤따라 일어선 지민이 얼른 짐을 챙겼다. 가게를 나오자,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민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앞장서 걸었다. 보폭은 좁다. 지민이 마음만 먹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뒤에서 총총거리며 따라오는 지민의 발소리를 경청한다. 그렇게 천천히 발을 뻗었다. 아주 천천히.

“언니!”

“왜 또.”

“다음 주에도 영화 봐요! 제가 골라 올게요.”

“꿈 깨. 다음에는 전쟁 영화 볼 거야.”

“잔인한 거 싫은데.”

“그럼 오지 말든가.”

“갈게요. 팝콘 사 주세요.”

그놈의 팝콘. 알았어. 캐러멜로 해 줄게. 민정이 웃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완벽하게 맞물리는 드럼과 건반처럼, 나란히.

저번엔 이 무대에 서는 것이 굉장히 떨리고 긴장돼서 제대로 못 봤는데 3주만에 다시 서는 클럽 어비스의 무대는 생각보다 더 좁았다. 객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앞줄에 선 관객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던 그런 기억. 그래도 이런 무대에 고정 밴드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판에서의 명성을 증명하는 거랬다.

지민은 건반 앞에 서서 객석을 훑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 저번 공연 때와는 또 다른 열기가 느껴진다. 손끝이 차갑다. 괜히 건반을 몇 번 눌러본다. 딩, 딩.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하다. 아까 리허설 하고 내려 놓았던 마스터 볼륨을 아직 안 올렸다. 뒤에서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지민, 쫄지 마. 저번이랑 똑같이 하면 돼.”

고개를 돌리자, 민정이 드럼 세트 뒤에서 스틱을 돌리고 있었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민정의 얼굴이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인다. 지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지 말라니. 너무 쉽게 말씀하시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는데. 인혜가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든다. 지민은 그제야 볼륨을 올렸다.

“헬로우 에브리원, 우린 새비지입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지민은 그 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와, 저번에도 많았지만 오늘은 진짜 많다. 민정의 카운트가 시작됐다. 원, 투, 쓰리, 포. 드럼 비트가 공기를 가른다. 지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첫 곡은 새비지의 시그니처 곡. 연습 때 수백 번도 넘게 쳤던 곡이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손이 떨리는지. 코드를 짚는데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민정의 드럼이 밀고 들어온다. 쿵, 쿵, 쿵. 킥 드럼의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지민은 그 박자에 몸을 맡겼다. 민정이 깔아준 진동하는 레드카펫 위를 달린다. 정박에 건반을 한번씩. 챳, 챳, 챳. 페달을 떼고, 음을 딱딱 끊는다. 연습 때 혼나면서 익힌 주법이다. 신기하게도, 민정의 드럼 소리 사이사이에 건반이 꽂힌다. 따로 노는 게 아니라, 하나의 소리를 만드는 것 같다. 그 위에 화음을 얹고,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노닌다.

두 번째 곡으로 넘어갔다. 템포가 빠른 곡이다. 지민은 건반을 두드리면서 슬쩍 민정 쪽을 훔쳐봤다. 민정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박자를 센다. 스틱 끝이 둥글게 허공을 가른다. 다음에 어디를 칠지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아, 저기서 필인인건가. 지민의 예상대로, 민정의 스틱이 탐을 훑으며 내려갔다. 투두두둥. 그 소리에 맞춰 지민이 텐션 코드를 얹는다. 딱 맞아떨어졌다. 민정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시선이 스친다. 민정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 같았다.

세 번째 곡. 인혜의 보컬이 전면에 나서는 곡이다. 건반은 배경에 머문다. 지민은 힘을 빼고, 단순한 코드 진행만 깔았다. 그러자 민정의 드럼이 더 화려해진다. 심벌을 후려치고, 스네어를 연타한다. 챙, 챙, 타다닥, 둥둥. 지민은 그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무대 위에서, 민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평소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드럼에만 집중하는 타오르는 사람만 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지민은 건반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다 손을 들어 마구 흔들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뛴다. 무대를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인혜가 지민의 어깨를 툭 쳤다. 도영은 막 달려와 지민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언니! 헬로우 에브리원 뭐냐구. 아까 웃겨 죽는 줄 알았네.”

“너 지금 내 발음 무시하냐. 어?”

“찔리나봥?”

“아니거든? 야, 지민이 완전 잘했어. 오늘 완전 좋았다.”

“정말요?”

“어. 민정이도 만족한 것 같던데?”

지민이 뒤를 돌아보니, 민정이 드럼 스틱을 정리하고 있다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턱을 까딱했다. 말은 안 해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다른 밴드 멤버들이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멋있었어요.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클래식 공연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대가 끝나면 다들 조용히 악기를 정리하고 흩어졌다. 누가 먼저 말을 거는 일도 드물었다. 여기는 다르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서로를 칭찬한다. 지민은 그 소란스러움이 낯설으면서도 좋았다.

“야, 정산하러 가자.”

민정이 가방을 메고 일어서길래 지민이 황급히 뒤따랐다. 사장실로 향하는 복도는 좁고 어둡다. 민정이 앞장서 걷는다. 지민은 민정의 등을 보며 걸었다. 작은 체구. 그런데 무대 위에서는 거인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지민은 여전히 무대가 두렵다. 실수할까 봐, 망칠까 봐. 그런데 민정은 틀려도 괜찮다고 했다. 죽자고 덤비지 말고, 즐기라고. 오늘, 지민도 조금은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산을 마치고 나오니, 밤공기가 차갑다. 민정이 후드 모자를 눌러썼다. 지민이 옆에 섰다.

“언니, 오늘 수고하셨어요.”

“그래. 너도.”

“저, 괜찮았어요? 제 연주?”

“나쁘지 않았어.”

또 그 말이다. 지민은 웃음이 났다. 나쁘지 않다는 게 민정의 기준으로 최고의 칭찬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민정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를 켰다 껐다 하다가, 결국 도로 집어넣는다.

“배고프다. 뭐 먹을래?”

“저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는 없어. 골라.”

“그럼…… 국밥?”

“오케이.”

두 사람은 골목을 빠져나와 24시간 국밥집으로 향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지만 홍대 밤거리는 여전히 시끄럽다.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지민은 민정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민정이 슬쩍 지민을 봤다.

“왜 그렇게 붙어.”

“사람 많아서요.”

“이게 뭐가 많냐.”

민정이 중얼거렸지만, 지민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국밥집 안은 한산했다.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자마자 민정이 물 두 잔을 따라왔다. 지민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대 위에서 쏟아낸 긴장 탓인지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민정이 메뉴판을 훑다 지민을 향해 툭 던졌다.

“야, 너 매운 거 먹어?”

“네, 잘 먹어요.”

“난 매운 거 별로니까 순대국으로 통일한다.”

“어? 네, 저도 좋아요.”

주문을 마친 민정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지민은 그런 민정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무대 위에서 그토록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던 사람은 어디 가고, 지금은 그저 몹시 지쳐 보였다.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그림자가 지민의 눈에 밟혔다.

“언니, 요즘 잠 잘 못자요?”

“왜?”

“다크서클이…… 좀 있어요.”

“신경 쓰여?”

“아뇨, 그게 아니라……”

“됐어. 원래 이래.”

민정이 무심하게 손등으로 눈 밑을 문질렀다. 지민은 더 묻지 않았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가 식탁 위에 놓였다. 민정은 뚝배기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는데도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언니.”

“응.”

“오늘, 정말 좋았어요.”

민정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지민을 봤다.

“뭐가.”

“무대요. 즐거웠어요, 무대가.”

지민의 눈이 반짝였다. 민정은 그 순수한 열정이 담긴 눈을 마주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국밥을 휘휘 저었다.

“그래. 잘됐네.”

“언니 덕분이에요.”

“내가 뭘 했다고.”

“드럼 쳐 줬잖아요. 덕분에 저도 안심하고 칠 수 있었어요.”

민정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내 일인데.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그래도 고마워요.”

환하게 웃는 지민의 모습에 민정은 대답 대신 순대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씹는 입 모양이 평소보다 바빠 보였다. 지민은 직감했다. 민정이 지금 몹시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사람이, 무대 밖에서 칭찬 한 마디에 이토록 어색해한다. 지민은 그 간극이 묘하게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니 새벽 세 시가 넘은 거리는 아까보다는 조금 한산해졌다. 민정이 하품을 했다.

“가자. 내일 또 연습 있어.”

“네.”

두 사람은 지하철역으로 향했지만 막차는 이미 끊긴지 오래다. 민정이 택시를 잡아 먼저 타려다가, 열린 차 문을 잡았다.

“너 먼저 가.”

“언니는요?”

“나는 다음 거 탈게.”

“같이 타면 안 돼요?”

“방향이 달라.”

“그래도……”

민정이 지민의 어깨를 툭 쳤다.

“빨리 타. 졸려 죽겠어.”

지민은 마지못해 택시에 올랐다. 창문을 내리고 민정을 봤다. 민정이 손을 흔들길래 지민도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지민은 뒤를 돌아봤다. 민정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작아지는 민정의 모습을 보며, 지민은 좀 허해졌다. 왜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운지. 내일 또 볼 건데.

이틀 후, 연습실. 지난 공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멤버들이 다시 모였다. 민정은 드럼 의자에 걸터앉아 습관적으로 스틱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을 확인하던 인혜가 입을 열었다.

“어비스 사장님한테 문자 왔다.”

“뭐래?”

민정의 물음에 인혜가 화면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새비지 뺏기긴 싫은데, 걔네 메인 밴드 하나가 펑크를 냈다지 뭐야. 도와달라고 나한테 사정사정을 하길래…… 슬쩍 놀다 와 주면 안 되겠어? 라네.”

주연이 기타 줄을 튕기며 물었다.

“어디?”

“벤트. 다다음 주 토요일.”

도영이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벤트면 괜찮지. 규모는 좀 작아도 소리는 잘 빠지는 데니까.”

“가자. 뭐.”

민정이 무심하게 대답을 던졌다. 지민은 옆에서 멤버들의 반응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이게 끝이야? 다들 왜 이렇게 담담한 걸까. 공연이 끝난 지 고작 이틀째였고, 다음 공연까지는 2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럼 셋리스트는요?”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지민에게 꽂혔다. 예상치 못한 집중 포화에 지민이 어깨를 움찔했다. 인혜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야, 지민아. 이 바닥에선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기회가 오면 일단 잡고 보는 거지.”

“네?”

“공연 들어오면 일단 하는 거야. 당장 셋리 짜자!”

주연이 노트를 펼쳐 들었고, 도영도 어느새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민정 역시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멤버들은 순식간에 실전 모드로 전환되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첫 곡은 역시 싱크 아웃으로 가야지.”

“어. 그 다음은 보더라인?”

“아냐, 걘 막판에 텐션 좀 떨어져. 코스모 하자.”

“좋아. 중간에 템포 좀 늦춰서 루시드 넣고.”

“마지막은 마이 빅토리로 끝내자. 확실하게. 벤트 날려버려.”

지민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대화가 너무 빠르다. 따라잡을 수가 없다. 곡 제목들이 마구 쏟아진다. 지민이 아는 곡도 있고, 처음 듣는 곡도 있다. 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다 지민을 봤다.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래서 지민은 좀 쫄았다. 왜, 왜요. 뭔데.

“야, 유지민.”

“네, 네?”

“너 루시드 알지?”

“아…… 아니요. 처음 들어요.”

민정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부터 외워. 2주면 충분하지?”

“네, 네!”

지민이 황급히 대답했다. 2주. 2주 안에 새 곡을 외우고, 셋리스트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 지민의 손바닥에 땀이 났다. 인혜가 지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하지 마. 우리가 다 알려 줄게.”

“감사합니다……”

민정이 다시 드럼 앞으로 갔다. 스틱을 집어 들고 말했다.

“자, 일단 루시드부터 맞춰 보자. 템포 80. A키.”

“언니, 저 악보……”

“없어. 들으면서 해.”

지민이 입술을 깨물었다. 악보 없이? 클래식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민정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드럼이 울렸다. 느린 비트. 지민은 건반 앞에서 얼어붙었다. 어떻게 쳐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어떻게 쳐야 하는지 모르는게 맞지 않나? 노래 자체를 모르는걸.

인혜의 보컬이 들어왔다. 주연의 기타가 따라왔다. 도영의 베이스가 부웅 울렸다. 다들 자기 포지션 안에서 자리를 찾아 앉는 동안 지민은 코드를 찾으며 앉을 자리를 찾아 헤멨다. A키, A키…… Am? 아니면 그냥 A? 손가락이 건반 위를 목적지 없이 떠돌았다.

민정이 연주를 멈췄다.

“야.”

“죄송해요……”

“일단 들어 봐. 코드만 잡아 줄게.”

민정이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천천히. 지민은 귀를 기울였다. 도영의 베이스 라인을 따라갔다. 아, 이게 루트 음이구나. 지민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건반을 짚었다. Am - F - C - G. 기본 진행이다. 지민이 코드를 깔자,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연주가 계속됐다. 지민은 코드를 따라가며 곡의 구조를 파악하려 애썼다. 벌스, 코러스, 브릿지. 이제야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곡이 끝나고, 지민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민정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다음은 코스모. 템포 175. 이건 알지?”

“……네.”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벤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지민은 창밖을 보며 허벅지 위 손가락을 움직였다. 에어 건반. 곡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는 중이다. 민정이 옆에서 지민을 힐끗 봤다.

“긴장했어?”

“아니요…… 괜찮아요.”

“거짓말.”

민정이 피식 웃었다. 지민이 민정을 봤다.

“언니는 안 떨려요?”

“떨리지. 맨날.”

“그래요?”

“어. 근데 익숙해.”

민정이 창밖을 봤다. 지민은 민정의 옆얼굴을 보았다. 떨린다고 말하는데, 표정은 담담하다. 지민은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떨려도 당당하게.

벤트에 도착했다. 어비스보다 작은 공간이다. 클럽 내부도 좁고, 무대도 좁고, 그만큼 객석도 빼곡하다. 지민은 건반을 세팅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관객과의 거리가 정말 가깝다. 맨 앞줄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맥박이 귓가를 두들겼다.

“사운드 체크 할게요!”

엔지니어의 목소리. 지민이 건반 전원을 켰다. 딩. 소리가 울렸다. 민정이 드럼을 몇 번 쳤다. 쿵, 타닥. 사운드를 확인한다. 인혜가 마이크 테스트를 했다.

“하나, 둘. 하나, 둘.”

리허설이 끝나고, 대기 시간. 지민은 손을 비벼댔다. 차갑다. 민정이 다가왔다.

“야, 손 떨지 마.”

“아, 죄송해요.”

“미안해할 것 없어. 떨리는 건 당연한 거야.”

민정이 지민의 손을 탁 쳤다.

“근데 무대 올라가면 집중해. 알았지?”

“네.”

민정이 돌아섰다. 지민은 민정의 등을 보며 심호흡했다. 괜찮아. 나 할 수 있어.

무대가 시작됐다. 첫 곡, ‘싱크 아웃’. 빠른 템포의 곡이다. 지민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렸다. 곧바로 민정의 킥 드럼이 심장을 걷어차듯 밀고 들어왔다. 쿵, 쿵, 쿵, 쿵.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발바닥부터 타고 올라왔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좁은 클럽 안을 가득 메웠고, 지민은 그 소음의 열기에 몸을 맡겼다.

두 번째 곡, ‘코스모’는 한층 더 빠른 곡이다. 지민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참고 집중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목을 조여왔지만, 문득 이곳이 정적만이 감도는 콩쿠르 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는 클럽 벤트, 습한 공기와 뒤섞인 함성 속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날뛰어야 하는 무대다. 관객들이 즐기게 하려면 나부터 이 소음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세 번째 곡, ‘루시드’로 넘어오며 템포가 가라앉았다. 지민은 건반 위에 얹은 손가락에서 힘을 뺐다. 서늘하게, 하지만 조용히 타오르는 내려앉은 공기 위로 차분하게 코드를 깔았다. Am - F - C - G#. 인혜의 목소리가 푸른 연기처럼 공간을 채웠다. 지민은 연주하며 처음으로 관객석을 찬찬히 훑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누르는 건반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선이 되어 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닿고 있다는 생경한 감각이 전율처럼 돋았다.

문득, 예전의 무대들이 떠올랐다. 홀로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오직 완벽한 악보만을 재현해야 했던 클래식 무대. 그때의 무대는 차갑고 정제된 박제 같았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관객들 앞에서 지민은 고독한 섬처럼 존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등 뒤에서는 민정의 드럼이 심장 박동처럼 뛰고 있고, 옆에서는 멤버들의 악기가 서로의 숨결을 실어 나른다. 관객들의 일렁이는 눈빛과 뜨거운 열기가 무대 위로 섞여 들었다.

살아있다. 박제된 선율이 아니었다. 혼자만의 완벽함도 아니었다. 무대 위의 우리와 무대 아래의 사람들이 하나의 호흡으로 묶여 꿈틀거리는, 지독하게 생생한 생명력이었다. 지민은 그 압도적인 연결감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음악 안에서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마지막 곡, ‘마이 빅토리’. 제목 그대로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아니, 앞길을 가로막는 건 무엇이든 싹 다 날려버리겠다는 악바리 같은 각오를 담은 곡이다. 민정의 드럼이 뇌수를 때리는 듯한 굉음을 토해내며 폭발했다.

쿵쿵타닥, 쿵쿵타닥! 지민은 민정의 그림자를 쫓듯 필사적으로 박자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순간, 민정이 돌연 궤도를 틀었다.

어?

연습 때 단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파격적인 필인이었다. 쿠구구구궁-! 타다다닥! 투두두둥-! 스네어와 탐탐을 무자비하게 훑고 지나가는 연타가 폭포수처럼 무대 위로 쏟아졌다. 지민의 손끝이 찰나의 순간 허공에서 멈칫했다. 당황해 고개를 돌리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롭게 관객들을 훑으며 야생마처럼 날뛰는 민정이 보였다. 이건 명백한 시험이자, 동시에 지민을 향한 강한 신뢰였다.

지민은 휘몰아치는 드럼 소리 너머로 민정의 몸짓을 예민하게 추적했다. 연타가 길어질수록 민정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시작 전 들이마신 숨을 단 한 점도 내뱉지 않은 채, 폐부의 마지막 산소까지 쥐어짜며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지민은 직감했다. 민정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이제 곧 억눌렀던 숨을 터뜨릴 임계점이라는 것을.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굳어 있던 민정의 어깨가 미세하게 위로 솟구쳤다. 억눌렸던 호흡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전조였다.

지금이다.

민정이 심벌을 내리치는 찰나, 지민의 코드 체인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렸다. 민정이 번뜩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찰나의 시선이 공중에서 뜨겁게 충돌했다. 예상치 못한 완벽한 합에 민정의 입가에 짜릿한 미소가 걸렸고, 지민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연주는 더 이상 추격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아름다운 하나의 톱니바퀴였다.

마지막 음이 잦아들자, 클럽 벤트가 무너질 듯한 환호가 쏟아졌다. 지민은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무대를 내려왔다.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그때, 땀에 젖은 인혜가 다가와 지민을 부서질 듯 껴안았다.

“미쳤다! 도영아 아까 얘 마지막에 민정이 패턴 바꿀 때 따라간 거 봤어?”

“저 진짜 겨우 따라간건데요……”

“야, 유지민! 겨우가 아니야. 완벽했어! 김민정 비트에 맞춰서 코드진행 섞는 걸 아무나 하는 건 줄 알아?”

주연과 도영도 지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민은 얼떨떨했다. 민정이 다가왔다. 지민을 보며 턱을 까딱했다.

“나쁘지 않았어.”

지민이 웃었다. 이제는 안다. 그게 최고의 칭찬이라는 걸.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위의 열기를 뒤로하고 장비를 정리해 싣는 시간. 지민은 익숙하게 케이블 한쪽 끝을 잡고 팔꿈치와 손을 교차하며 8자로 감아 나갔다. 처음 밴드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모르면 그냥 내려놓고 비키라는 소리나 듣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제법 손놀림이 능숙해졌다.

옆에서는 민정이 땀에 젖은 얼굴로 드럼 세트를 해체하고 있었다. 지민이 감던 케이블을 갈무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왜.”

“아까…… 패턴 바꾼 거요.”

“어.”

“제가 따라올 줄 어떻게 알았어요?”

민정이 스틱을 케이스에 넣으며 픽, 하고 웃었다.

“몰랐는데?”

“네?”

“그냥 내질러 본 거야. 네가 못 따라오면 나 혼자 튀고 마는 거지, 뭐.”

“진짜요? 그냥 해본 거라고요?”

민정이 고개를 돌려 지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대 조명이 빠진 눈동자가 담백하게 빛났다.

“근데 너, 안 늦고 잘 따라왔잖아. 잘했어.”

순간 지민의 가슴 속으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냥 해봤다’는 말 뒤에 숨겨진, 자신을 향한 무모할 정도의 신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민정은 다시 무심하게 장비 가방의 지퍼를 올렸지만, 지민에게는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 값진 찬사였다.

지민은 벅찬 마음을 누르며 다 감은 케이블을 케이스 안에 소중히 밀어 넣었다.

장비를 다 싣고, 차에 올랐다. 이번에도 민정과 나란히 뒷자리에 앉았다. 차가 출발하자 운전석에 앉은 도영이 라디오를 켰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민은 창밖을 보다가,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민정 쪽으로 기울었다. 눈이 꿈뻑꿈뻑 감기는 게 피곤했다. 민정의 어깨에 머리가 닿으니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지민이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졸려서……”

“……괜찮아.”

민정이 창밖을 보며 가만히 있었다. 지민의 호흡이 규칙적이다. 잠든 것 같다. 민정은 어깨를 움직이지 않으려 조심했다.

“야, 김민정. 너 아까 왜 그랬냐?”

“뭘?”

“필인. 평소랑 전혀 달랐잖아. 물론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한데, 연습때 한 번도 안해본 짓 하길래.”

“그냥.”

민정이 어깨를 으쓱 하려다 지민의 고개가 자기 어깨에 얹혀 있는걸 깨닫고는 눈썹만 까딱 올린다. 인혜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민정을 노려보며 더 긴 설명을 요구했다.

“얘가 따라올 것 같아서.”

도영이 백미러로 민정과 기대고 있는 지민을 힐끗 보며 피식 웃었다.

“맹한 수달 같은 게 따라올 것 같았다고? 하긴, 오늘 보니까 맹하진 않더라. 걔 리사이틀도 열었었다던데, 못하는 게 이상하긴 해.”

“리사이틀? 그거 존x 잘 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아니, 잘 치긴 한데……”

“우리랑은 전혀 다른 세계긴 하지. 근데 이렇게 금방 따라올 줄은 몰랐어.”

“……그러게, 요새 열심히 하더라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주연이 화들짝 뒤를 돌아봤다. 인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김민정 입에서 칭찬이? 놀라 물었더니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는 조용히 하란다. 애 깬다고.

“아니, 이 역사적인 순간에 조용히 하긴!”

말은 그러면서도 속삭이며 경악하는 주연과 인혜다.

“녹음 못한 게 아쉽네. 민정 언니가 칭찬했다는 증거를 남겨야 하는데. 지민이가 그거 보면 좋아할 걸?”

“닥쳐. 운전이나 해.”

주연이 핸드폰을 꺼내들며 중얼거렸다. 단톡방에 올려야겠다. 김민정, 신입 칭찬함. 목격자 다수. 야, 임주연. 진짜 조용히 안 해? 민정이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차가 연습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랬다. 도영이 뒤를 돌아봤다.

“도착했어.”

민정이 지민을 흔들었다.

“야, 도착했어.”

지민이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민정의 어깨에 아까부터 쭉 기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침 같은 건 안 흘렸겠지? 코는 안 골았겠지? 뒤늦게 허둥대며 사과부터 건넸다.

“죄송해요!”

“됐어. 내려.”

지민이 슬쩍 눈치를 봤지만 기분 나빠하거나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바깥쪽에 있던 지민이 차에서 내렸고, 민정도 뒤따라 내렸다. 연습실에 짐을 내려둔 멤버들이 인사를 나누고 흩어졌다. 민정과 지민만 남았다.

“언니, 어깨 괜찮아요?”

“괜찮아.”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신경 쓰지 마.”

민정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지민이 재빠르게 뒤따랐다. 서너 걸음 후에는 나란히 걸었다. 슬슬 밤공기가 차가웠다.

며칠 후. 지민은 연습실에 새벽같이 도착했다. 아직 모르는 새비지 곡이 좀 있어서 건반 앞에 앉아 곡을 연습하고 있는데 민정이 들어왔다. 손에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왔어?”

“네, 언니.”

민정이 봉투를 테이블에 놓았다. 캔 커피와 삼각김밥.

“아침 먹어.”

“감사합니다.”

지민이 삼각김밥을 뜯었다. 민정은 드럼 앞에 앉아 워밍업을 시작했다. 투둥, 투둥. 지민은 김밥을 먹으며 민정을 봤다. 민정의 손놀림이 정확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메트로놈도 아니고. 메트로놈을 삼킨 듯한 리듬감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호흡이다. 연타가 시작되면 마치 생존을 포기한 사람처럼 숨을 참다, 심벌을 내리치며 모든 숨을 쏟아낸다. 보는 사람도 그 순간만큼은 호흡을 같이 멈추게 될 정도다.

“야, 밥 먹으면서 쳐다보지 마. 여기가 디너 바도 아니고.”

“죄송해요.”

지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민정이 웃었다.

“다 먹으면 맞춰 보자.”

“네!”

지민은 삼각김밥을 빠르게 먹었다. 민정이 카운트를 센다. 원, 투, 쓰리, 포. 드럼과 건반이 어우러졌다. 지민은 민정의 박자를 읽는 게 점점 쉬워지고 있다. 단순히 귀로 듣는 비트가 아니었다. 연타 직전 삐죽이는 입술, 숨을 참으며 굳어지는 어깨의 각도까지. 얼마나 자세히, 여러번 봤는지 지민은 민정의 사소한 습관들을 모조리 기억하게 됐다. 덕분에 민정이 필인을 넣을 타이밍, 템포를 바꿀 순간이 마치 악보라도 펼쳐진 듯 선명하게 보였다. 지민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연주가 끝나고, 민정이 물을 마셨다. 분명 미지근한 물인 걸 알고 있는데도 엄청나게 시원해 보일 정도로 목이 꿀렁이며 움직이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야.”

“네?”

“너 많이 늘었다.”

“……정말요?”

“어. 벤트 때 봤어. 니가 내 드럼 듣고 있었잖아. 너 그 때도 나 봤지?”

지민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쵸. 언니 따라가려고 많이 연습했어요.”

“내가 뭘 한다고.”

민정이 시선을 돌렸다. 지민은 민정이 쑥스러워하는 걸 알았다. 그런 모습이 좋았다.

새비지에 들어간 후로 정말 오랜만에 공연도, 연습도 없는 주말. 지민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메시지 알림음이 들려 휘딱 몸을 뒤집었다. 민정이었다.

> 시간 있으면 나와. 음반 가게 갈 거야.

이런 연락이 온 것도 처음이었지만, 답을 바로 안 하면 없던 일로 하고 혼자 가버릴까 봐 지민은 바로 벌떡 일어나 자판 위를 두들겼다.

> 네! 어디서 만나요?

> 합정역 3번 출구. 50분 후.

50분. 준비하고 거기까지 나가기엔 그리 충분하지는 않은 시간. 주말이라고 씻지도 않고 뒹굴지 않길 다행이었다. 지민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었다. 립밤을 바르고, 코트를 걸쳤다. 데이트 가는 기분이었다.

합정역에 도착하니 민정이 이미 와 있었다. 검은색 패딩에 모자를 눌러쓴 모습이다. 지민이 다가가자 민정이 민정을 위아래로 훑더니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며 중얼거린다. 으, 보기만 해도 추워.

“왔어? 안 춥냐.”

“네, 아직 괜찮은데요.”

“젊은 게 좋긴 좋아. 가자.”

푸흡. 나이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민정도 젊은이면서, 다 늙은 사람 같은 소리를 하길래 지민이 웃었다.

두 사람은 골목을 따라 걸었다. 음반 가게는 골목 안쪽에 있었다.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지 냄새와 종이 냄새가 났다. 벽면 가득 LP와 CD가 꽂혀 있다. 민정이 능숙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지민은 두리번거리며 뒤따랐다.

“여기 자주 와요?”

“어. 가끔.”

민정이 LP를 훑으며 손가락으로 재킷을 하나하나 넘긴다. 지민은 민정 옆에 서서 구경했다. LP는 낯설지 않다. 교수님 연구실에도, 학교 자료실에도 가득했다.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 하지만 그건 늘 누군가 골라준 것들이었다. 들어야 할 음반, 참고해야 할 연주. 지민은 한 번도 스스로 LP를 고른 적이 없었다. 어떤 걸 골라야 할지도 몰랐다. 민정이 LP 하나를 꺼냈다.

“이거 들어봤어?”

“아니요. 뭔데요?”

“레드 제플린. 들어 봐. 좋아.”

민정이 LP를 지민에게 건넸다. 지민은 재킷을 들여다봤다. 낡은 표지. 오래된 음반인 것 같다.

“집에 턴테이블 있어?”

“없는데요……”

“그럼 CD로 살게.”

민정이 CD 코너로 가길래 오리새끼 마냥 졸졸 따라갔다. 민정이 몇 장을 골라 지민에게 건넸다.

“이것들 들어 봐. 다 명반이야.”

“감사합니다.”

지민이 CD들을 받아 들었다.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너바나. 너바나는 들어본 적만 있고, 나머지는 들어본 적 없는 그룹 이름들이다. 민정이 계산대로 가길래 지민이 황급히 따라가며 말했다.

“언니, 제가 살게요!”

“됐어. 내가 산다.”

“그래도……”

“니가 들을 건데, 내가 사는 게 맞잖아.”

그런…… 건가? 하고 지민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동안 민정이 카드로 결제를 마치고 민정이 봉투를 지민에게 건넸다.

“집 가서 들어 봐.”

“네. 꼭 들을게요.”

민정이 다시 LP 코너로 갔다. 이번에는 혼자 고르는 것 같다. 지민은 민정 옆에 서서 기다렸다. 민정이 LP를 몇 장 집어 들었다. 재킷을 뒤집어 트랙리스트를 확인하는 민정의 옆얼굴을 봤다. 진지한 표정이다. 음악을 고를 때의 민정은 남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야.”

민정이 갑자기 지민을 봤다. 그 바람에 민정을 계속 보고 있다가 눈 마주친 지민이 깜짝 놀랐다.

“넹?”

“네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은 뭐야?”

“피아노곡이요? 오케스트라? 아니면 언니도 들어봤을만한 영화 음악 종류요?”

“……아무거나.”

지민이 눈을 반짝였다.

“언니가 듣게요? 클래식? 진짜?”

“이씨. 됐어.”

민정이 고개를 돌렸다. 귀끝이 살짝 빨개진 것 같다. 지민이 웃었다.

“아아앙~ 제가 좋아하는 거 추천해 드릴게요. 스포티파이로 쫙 뽑아서 보내드릴게요!”

“그러던가.”

민정이 중얼거렸다. 지민은 신이 났다. 민정이 클래식을 듣겠다고? 믿기지 않는다. 지민은 마음속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쇼팽? 드뷔시? 아니면 라흐마니노프? 민정이 좋아할 만한 곡들을 골라야겠다.

“언니, 진짜 보낼 거예요?”

“어.”

“약속이에요!”

“알았어. 시끄러워.”

민정이 자기가 들고 있던 LP까지 계산하고 가게를 나섰다. 지민이 뒤따랐다.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민정이 걸으며 물었다.

“배고파?”

“네.”

“뭐 먹을래?”

“언니가 좋아하는 거요.”

“너는 맨날 내가 고르게 하네.”

“언니가 고른 게 다 맛있었거든요.”

민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라멘 먹으러 가자.”

“좋아요!”

두 사람은 라멘 가게로 향했다. 작은 가게라 카운터석에 나란히 앉았다. 주문을 하고 얼마 안 있어 뜨거운 라멘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지민이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들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었다. 민정도 라멘을 먹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먹다가 가끔 서로를 힐끗 본다. 시선이 마주치면, 얼른 돌아본다.

“야.”

“네?”

“오늘…… 재밌었어.”

지민이 눈을 크게 떴다.

“저도요!”

민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에 또 오자.”

“네! 언제든지요!”

지민도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작은 라멘 가게 안을 채웠다.

그날 밤, 지민은 민정이 사준 CD를 오디오에 밀어 넣었다. 잠시 뒤, 거칠게 긁어대는 레드 제플린의 기타 리프가 날 선 칼날처럼 방 안의 정적을 베어 물었다. 지민은 침대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음악은 그가 평생을 몸담아온 클래식의 세계와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악보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 갇혀 있던 질서정연한 음표들이 아니라,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소리들. 거칠고, 자유롭고, 당장이라도 타오를 듯 뜨거웠다. 그건 지독할 정도로 민정의 드럼을 닮은 음악이었다.

음악이 고조될수록 지민의 귓가엔 민정의 드럼 소리가 환청처럼 겹쳐 들렸다. 무대 위, 조명 아래서 가장 선명하게 빛나던 민정의 잔상이 눈꺼풀 뒤로 일렁였다. 스틱을 휘두를 때마다 흩날리던 땀방울,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던 그 맹수 같은 눈빛. 민정은 드럼을 연주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드럼이라는 악기를 통해 제 안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숨을 멈춘 채 생존을 건 연타를 쏟아붓고, 마지막 심벌을 내리치며 해방감을 만끽하던 그 찰나의 표정. 지민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 언저리에 민정의 킥 드럼이 남긴 묵직한 진동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한 곡이 끝나고 핸드폰을 들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 잘 들어갔어?

집 온지 한참인데, 이제서 물어보는 건가. 지민이 답장했다.

> 네! 언니도요?

> 어 네가 보내준 거 듣고 있어

> 어때요?

> 나쁘지 않네 잠 잘 올듯

지민이 웃었다. 나쁘지 않다는 건, 좋다는 뜻이다. 지민은 답장을 보냈다.

> 저도 지금 자고 새벽에 연습 가도 돼요?

> 그래

> 네! 잘 자요 언니

> ㅇㅇ

> 잘 자

지민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음악을 들었다. 창밖으로 밤하늘이 보인다. 별이 몇 개 보인다. 지민은 생각했다. 나, 지금 되게 행복한가 봐.

연습실 공기가 과도한 긴장으로 팽팽했다. 민정이 드럼 의자에 앉아 스틱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인혜가 어비스 사장님 메시지가 왔던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야아- 이번 공연, 진짜 중요하잖아? 페스티벌 기획자들이라니?”

“어. 광고주들도. 사장님은 대체 어디서 그런 연줄이 생긴 거지.”

도영이 베이스 줄을 튕기며 대답했다. 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잘하면 락페 갈 수도 있대. 진짜로.”

지민은 건반 앞에 앉아 그 대화를 들었다. 손에 땀이 났다. 락페스티벌. 그 큰 무대에? 우리가? 내가? 지민은 개인 리사이틀을 열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그것도 클래식이라는, 평생을 준비해온 세계에서. 그런데 밴드에 들어온 지 몇 달 만에 락페스티벌? 세계가 다르긴 해도, 너무 빠른 것 같았다. 내가 저 무대에 설 자격이 있나. 민정이 스틱으로 림을 탁탁 쳤다.

“그것도 우리가 잘 해야 갈 수 있는 거지. 떠들지 말고 집중해. 처음부터 간다.”

카운트가 시작됐다. 원, 투, 쓰리, 포. 드럼 비트가 합주실의 공기를 갈랐다. 지민의 손가락이 건반을 짚자 익숙한 선율이 얹혔다. 연습은 순조로웠다. 첫 곡, 두 번째 곡. 민정의 드럼은 여느 때처럼 안정적이었고, 지민은 그 리듬 위에 편안하게 몸을 실었다.

세 번째 곡 중반부, 폭풍처럼 몰아치는 빠른 필인 구간에 진입했다. 민정의 어깨가 팽팽하게 솟구쳤다. 시작됐다. 민정은 다시 숨을 참기 시작했고, 스틱은 비명이 나올 만큼 빠른 속도로 탐을 훑으며 내려갔다. 투두두타닥!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연타가 이어지던 그때였다.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정의 왼손 스틱이 바닥을 굴렀다. 연주가 멈췄다. 합주실의 정적 속에서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민정에게 꽂혔다. 민정은 일그러진 얼굴로 제 왼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 두툼하게 박인 굳은살 주변이 벌겋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반복되는 과도한 타격에 힘줄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손가락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민정은 떨리는 손목을 붙잡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통증보다 더한 당혹감이 민정의 눈동자에 서렸다.

“민정아, 괜찮아?”

인혜가 다가왔다. 민정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좀 따끔해서.”

민정이 스틱을 주워 들었다. 다시 쥐려는데, 손이 떨리며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민정이 이를 악물고 반대쪽 손으로 왼손을 꾹 눌러 스틱을 쥐었다.

“다시 하자.”

“언니, 잠깐만. 손 좀 보자. 방금 뭐 부러지는 소리 난 거 같은데?”

도영이 다가왔지만 민정이 손을 뒤로 빼는 게 더 빨랐다.

“괜찮다니까. 계속하자.”

“언니……”

“됐어. 시간 없어.”

민정이 다시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원, 투. 그런데 스틱을 쥔 왼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쓰리, 포. 드럼이 울렸다. 민정이 이를 악물고 치지만 연주가 삐걱거렸다. 타이밍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민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뇌에서는 치라고 명령하는데, 왼손 스틱은 늪에 빠진 것처럼 둔탁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스네어 드럼의 림을 때릴 때마다 뼈를 타고 올라오는 진동에, 마치 뜨거운 기름이라도 부은 듯한 통증이 손등을 타고 팔목까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한 곡이 끝나고, 민정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 일단 쉬는 게……”

“괜찮아.”

“아뇨. 손 보여주세요.”

지민이 민정에게 다가갔다. 민정이 또 손을 감췄다.

“신경 쓰지 마.”

“언니.”

지민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민정이 지민을 봤다. 지민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평소 억울해 보이는 수달 같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단단하게 굳은 표정만 남아 있었다. 연주에 관해서만큼은 물러서지 않는다던 그 모습이었다. 민정이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지민이 민정의 손을 조심조심 받아 들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부어 있고, 붉은 기가 돈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그 부위를 눌렀다. 민정이 움찔했다.

“아파요?”

“……조금.”

“이거 좀 심각해 보이는데요.”

지민이 민정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병원에 가 봐야 알겠지만, 제가 봤을 땐 일주일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뭐?”

민정이 반사적으로 손을 힘주어 빼냈다.

“일주일? 공연이 열흘 남았는데?”

“그래서 지금 쉬셔야 해요. 지금 일주일 안 쉬면, 나중엔 일 년을 쉬어도 안 나아요.”

지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민정이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니가 뭘 알아?”

“저도 손가락 다쳐 봤어요. 미세 골절이었는데, 그때 무리하게 연습했다가...”

지민이 뒷말을 삼켜서 민정이 지민을 빤히 봤다.

“그래서?”

“완치까지 반년 걸렸어요. 그러니까 제발, 지금은 쉬시는 게 맞아요. 병원도 가고.”

“지금 쉬면 공연은 어떡하고. 드럼 없이 올라가게?”

“공연은…… 제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언니는 일단 치료부터,”

“니가 어떻게든 한다고? 드럼 없이? 객원 구할래?”

민정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엔 비아냥보다 막막함이 서려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언니가 조금만 쉬면……”

“조금? 일주일이 조금이야? 당장 10일 후가 공연인데?”

민정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지민이 숨을 들이켜며 다시 차분하게 설득하려 애썼다.

“그럼 연습 강도를 낮추거나, 아니면 곡 구성을 바꾸더라도......”

“바꿔? 지금?”

“언니 손이 더 중요하잖아요. 일단 병원부터 가야-...…”

결국 민정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 공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이래? 우리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는 공연이라고.”

“알아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쉬셔야 한다고요!”

민정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지만 지민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중에 손을 아예 못 쓰게 되면 그때는 어쩔 건데요? 이 공연 한 번으로 끝이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공연은 더 많을 거고, 그 때에도 언니는 드럼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언니가 지금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고 있잖아요! 겁나서!”

민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니가 뭘 알아?”

“저 미세 골절로 반년 동안 피아노 한 번도 못 쳤어요. 반년이에요, 언니. 병원 가서 치료 받고, 쉬었으면 한 달이면 나을 걸, 반년을 못 쳤다고요……”

지민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져서 민정이 지민을 빤히 봤다.

“그래서 알아요. 지금 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 사이에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은 거. 근데 진짜로 무너지는 건 몸이 버티지 못할 때예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해.”

민정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지민이 민정의 팔을 잡았다.

“언니.”

“놓으라고.”

“언니, 제발……”

민정이 지민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연습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지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인혜가 다가와 지민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민정이 원래 저래. 좀 있으면 풀려.”

하지만 지민은 민정의 눈빛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눈빛은 화가 난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민정은 연습실을 나와 골목을 걸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를 찔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지만, 왼손은 주머니 안쪽의 부드러운 안감에 닿는 것조차 거부하듯 욱신거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박동하듯 펄떡이며 찌릿거렸다. 아프다. 솔직히 말하면,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아프다. 방금 전 스틱을 놓쳤을 때의 그 둔탁한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멈추면 모든 게 끝이다. 죽어도 놓칠 수 없는 무대였다. 페스티벌 기획자와 광고주들이 온다는 이번 공연에 새비지의 미래가 전부 걸려 있었다. 세미가 떠나고 지민이 들어오기까지, 다리 한 짝 잃은 의자 같이 기우뚱거리다 겨우 다시 궤도에 올랐다. 그런데 고작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밴드를 처음 시작하던 날, 자신만은 절대로 부상을 핑계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락페스티벌은 민정이 밴드로 성공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통증보다 더 날카롭게 민정을 찔렀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좀 놀란 거야. 민정은 주머니 속에서 떨리는 왼손을 억지로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불을 지핀 듯한 통증이 번졌지만, 그 고통보다 눈앞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다.

괜찮아. 파스 붙이면 나아질 거야.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게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는 걸, 무리해서 생긴 부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일주일 안 쉬면, 나중엔 일 년을 쉬어도 안 나아요. 평소엔 지 돌멩이 뺏어가도 멍충이 수달처럼 히히 웃던 애가 얼굴을 굳히고 단호하게 굴었다.

고개를 저었다. 걔가 뭘 알아. 밴드가 뭔지, 이 바닥이 얼마나 치열한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하나도 모르잖아.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안 올 수도 있어. 기획자들, 광고주들. 그들 앞에서 우리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민정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그냥 걷는다. 홍대 거리는 여전히 시끄럽다. 술 취한 사람들, 웃음소리, 음악 소리. 그 소음 속에서 민정은 혼자였다.

문득 삼촌이 떠올랐다.

민정이 처음 드럼을 잡은 건 일곱 살 때였다. 삼촌이 낡은 스틱을 쥐어 주었다. 민정아, 심심해? 이거 쳐 볼래? 진짜 재밌어. 민정은 그때부터 드럼에 빠졌다. 삼촌은 민정에게 기본기를 가르쳤다. 손목 스냅, 그립, 박자 읽는 법. 삼촌은 좋은 선생이었다. 아니, 좋은 드러머였다.

삼촌은 젊었을 때 클럽을 누볐다고 했다. 홍대 바닥에서 나름 이름 있는 드러머였다. 하지만 스물여섯에 킥 드럼 페달을 밟다가 삐끗해서 발목 연골을 다쳤다. 수술하고, 재활하고, 매일 물리치료를 받고. 하지만 결국 완치는 되지 않았고, 삼촌은 드럼을 그만뒀다.

“이제 그만 해야지.”

삼촌이 어느 날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삼촌이 가르쳐준 드럼 치는 법이 재미있다는 8살 난 조카 앞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제대로 된 조언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엄마도 매일 나만 보면 한숨 쉬는데.”

민정은 그때 삼촌의 눈빛을 기억한다. 체념 그리고 후회. 삼촌은 드럼을 그만둔 뒤로 이것저것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편의점 알바, 대리운전, 공사판 막노동. 가족들은 삼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간 버리고 젊음 버린 놈, 내논 자식. 그런 말들이 오갔다.

민정은 그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스무살이 되어 처음 밴드를 시작할 때 다짐했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밴드로 성공하겠다고. 삼촌처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느 날, 술 취한 삼촌이 말했다. 민정은 그때 이미 세미와 인혜와 함께 새비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민정아, 사실 말이야……”

삼촌이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발목은 핑계였어. 진짜로는…… 무서웠던 거야. 계속 이 짓 하다가 나이 들면 어떡하나. 돈도 못 벌고, 아무것도 안 되면 어떡하나. 그래서 발목 다친 걸 기회로 삼은 거지.”

민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삼촌이 스스로 포기한 거였고, 부상은 핑계였다.

“후회해?”

“매일.”

삼촌은 그때 고개를 끄덕였었다.

민정은 멈춰 섰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다. 골목인지, 대로변인지. 손이 떨린다. 왼손만이 아니라, 오른손도. 아니, 몸 전체가 떨린다.

무섭다.

이 공연을 망치면 어떡하지. 손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드럼을 못 치게 되면 어떡하지. 나도 삼촌처럼 포기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일어서야 한다. 그게 내가 사는 방법이니까.

민정은 핸드폰을 꺼내 약국을 검색했다. 24시간 약국. 파스를 사야 한다. 소염제도. 그리고 내일부터 다시 연습한다. 손이 나을 때까지 참고 친다. 열흘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검색된 결과, 약 250m 거리에 약국이 있다고 떴음에도 민정은 그쪽으로 발을 옮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민정의 집 초인종이 울렸다.

삐롱 삐롱

민정은 새벽에 만사가 귀찮아서 소파에 누워 잠들었던 그대로였다. 대체 누가 아침부터 벨을 누르고 난리야. 분명 교회 나오라는 홍보일 거다. 하지만 20초 후, 초인종이 또 울렸다.

삐롱 삐롱 삐롱

민정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지민이 서 있었고, 걔 손에는 마트 봉지가 들려 있었다.

“……뭐야.”

“아침 해드리러 왔어요.”

“아침?”

“네. 언니 혼자 있으면 제대로 안 드실 것 같아서.”

민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니가 왜.”

“들어가도 돼요?”

허락을 받으려고 물어본 것이 아닌 듯, 지민이 대답 없는 민정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민정이 어이없어하며 문을 닫았다. 지민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부엌으로 갔다. 마트 봉지를 식탁에 올려놓는다. 계란, 빵, 우유, 과일.

“유지민.”

“네?”

“누가 들어오래?”

“죄송해요. 근데 언니 그 손으로 뭐 못할 거 아녜요.”

지민이 민정의 왼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제 문제가 생겼던 바로 그 손에는 흰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괜찮다고.”

“거짓말. 괜찮으면 그렇게 감아놨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병원은 가셨나 봐요. 뭐래요?”

어젯밤, 아니 새벽에 민정은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솔직히 어디 찢어지고 부러진 것도 아닌데 이런 걸로 응급실에 가도 되나 싶었지만 의사가 민정의 손을 꾹꾹 눌러본 후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말했다.

“빨리 오셔서 다행이네요. 굳은살 앉은 거 보니까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이런 거 잘못 방치하면 영구적으로 근육 손상 올 수 있어요.”

“평소랑 아픈 게 좀 달랐어요. 뭐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의사가 민정의 왼손을 잡아당겨 이리저리 살폈다.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보고, 엄지뿌리 근육을 꾹 눌렀다. 민정은 신음이 터지려는 걸 참으려 이를 악물었지만,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의사가 민정의 손바닥에 잡힌 단단한 굳은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손을 왜 이렇게 험하게 써요? 운동해요? 아니면 뭘 꽉 쥐고 반복적으로 휘두르나?”

민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냥…… 좀 썼어요.”

의사는 더 캐묻지 않고 초음파 기기를 가져왔다. 차가운 젤이 손목에 닿았다. 모니터를 살피던 의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급성 건막염이네요. 힘줄을 싸고 있는 막이 마찰 때문에 퉁퉁 부었어요. 여기 화면 보면 하얗게 뜬 거 보이죠? 이게 다 염증이에요. 이 정도면 방금 손가락이 마비된 것처럼 굳었을 텐데. 물건 안 놓친 게 다행이네.”

민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틱을 놓쳤던 그 비참한 순간이 들킨 것 같아 손끝이 저릿했다. 의사는 차트를 넘기며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뭐 하는 분인지는 몰라도, 일주일은 이 손 아예 없는 셈 치고 사세요. 젓가락질도 하지 말고. 물리치료 매일 받고 약 먹으면 통증은 금방 잡히겠지만, 그건 나은 게 아니라 잠시 재워두는 겁니다. 일주일 안에 다시 무리하면 그땐 진짜 골치 아파져요. 알았죠?”

민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사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공연까지는 열흘. 일주일을 쉰다면 사흘밖에 없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응급실을 나오면서도, 민정의 머릿속은 온통 숫자 계산뿐이었다. 사흘이면 충분할까. 손이 나을까. 아니, 나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손을 안 쓰고 살지? 왼손이라 그나마 나은가…

“급성 건막염이래. 일주일정도 물리치료 받으면서 약 먹으면 낫는대.”

젓가락질도 하지 말라는 말은 숨겼다. 연습은 해야 하니까. 그런데 지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거 일주일 동안 그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말이잖아요.”

“……응.”

“제가 급성 건막염이 어떤지 모를 줄 알아요? 저도 다 겪어 봤단 말예요. 피아노도 손목 쓰고 손가락 쓰는데. 반복 동작은 똑같거든요?”

지민의 눈이 쭉 찢어져선 민정을 노려본다. 평소엔 돌멩이 빼앗긴 수달 같더니, 지금은 애착 돌멩이를 사수하는 수달 같았다. 그런데 그 애착 돌멩이가 민정의 손인.

“언니, 제발 이번엔 제대로 쉬세요. 일주일만요. 네?”

지민은 그 길로 민정의 집에 눌러앉았다. 이불 하나면 충분하다며 거실 소파를 떡하니 차지하더니, 그때부터 민정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아침, 점심, 저녁에 가끔 간식까지. 처음에는 혼자만의 공간에 누군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어색하고 ‘사육’당하는 기분마저 들어 불편했다. 하지만 지민의 존재는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가구처럼 금세 자연스러워졌고, 민정은 어느덧 그 평화로운 침범에 익숙해졌다.

나흘째 되던 날, 민정은 지민이 잠시 연습실에 간 사이 금기시되던 드럼 스틱을 쥐었다. 아니, 정말로 치려던 건 아니었다. 집 한쪽에 놓인 연습용 패드와 그 옆에 꽂힌 스틱을 보니 몸이 먼저 반응했을 뿐이다. 왼손이 욱신 거렸지만 무시할 만했다.

탁, 탁. 가볍게 패드를 두드려보았다. 손끝에 닿는 반동이 기분 좋았다. 템포를 조금 올려보았다. 타다닥, 타다닥. 통증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딱 한 마디만 더.

“언니!”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민정이 어깨를 움찔했다. 패드 치는 소리에 묻혀 지민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지민은 번개처럼 달려와 민정의 손에서 스틱을 빼앗아 갔다.

“뭐 하는 거예요?”

“연습.”

“손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조금밖에 안 쳤어.”

“안 괜찮아요!”

지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지민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울려고 하는데...… 언니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미안. 민정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울 정도로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지민의 눈망울을 보니 죄책감이 왈칵 밀려왔다.

“미안하면 다예요? 손 더 망가지면 어떡하려고요?”

지민은 화가 난 듯 스틱을 거실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연습용 패드를 들어 올렸다. 민정이 벌떡 일어났다.

“그거 어쩌게! 뭐 하는 건데!”

“언니 앞에 두면 또 칠 거잖아요. 치워버릴 거예요.”

“야, 유지민.”

“그냥 분해해서 놔둘 거니까 걱정 마세요.”

지민이 낑낑대며 다리와 패드를 분해하더니 현관 쪽으로 향했다. 신발장 위에 짐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던 지민의 손이 미끄러진 건 찰나였다. 균형을 잃은 패드가 기울었고, 당황한 지민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어어, 뒤따라오던 민정이 반사적으로 지민을 붙잡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엉킨 발걸음은 두 사람을 한데 묶어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민이 민정의 위로 엎어졌다. 옆으로 굴러간 패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췄고, 현관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겁네, 너.”

민정이 중얼거렸다. 지민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손이 민정의 어깨를 짚었다. 얼굴이 가깝다. 너무 가깝다. 지민의 숨소리가 들린다. 민정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죄, 죄송해요…… 언니 괘, 괜찮아요?”

지민이 비켜나려는데, 민정이 지민의 팔을 잡았다.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지민이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야.”

“네……”

“나 좀 일으켜줘. 왼손 쓰지 말라며.”

“아……네!”

지민이 서둘러 민정을 부축해 일으켰다. 두 사람 모두 일어섰지만, 지민의 얼굴은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민정 역시 귀끝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 보이니까 치고 싶었어.”

“……알았어요. 이번 한 번만이예요.”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패드를 주워 이번엔 제대로 신발장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민정은 그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전, 지민의 얼굴이 너무나 가까웠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민정은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언니, 저녁 뭐 드실래요?”

드디어 패드를 제대로 올려둔 지민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민정이 황급히 손을 내렸다.

“……아무거나.”

“’아무거나’라는 메뉴는 없어요.”

지민이 웃었다. 민정은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일주일이 지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지민도 함께였다. 끈질기게 자기도 데려가라고 우기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사가 민정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오셨네요. 손 좀 봅시다.”

민정이 왼손을 내밀자 의사가 익숙한 손길로 붕대를 풀었다. 일주일 사이 부기가 눈에 띄게 빠져 있었다. 의사가 손등과 손가락 사이를 이리저리 누르며 살폈다. 지난주처럼 비명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은 아니었지만, 민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통증의 유무와 차도를 묻는 평범한 문답이 오가고, 차가운 젤이 민정의 손목에 뿌려졌다. 초음파 화면을 유심히 살피던 의사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염증이 많이 빠졌네요. 여기 보이죠? 지난주에는 여기가 하얗게 퉁퉁 부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그럼 이제 괜찮은 거예요?”

민정이 묻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지민이 선수를 쳤다. 의사가 고개를 돌려 지민을 보았다.

“보호자세요?”

“뭐어, 네…… 비슷한?”

지민이 애매하게 대답하며 민정의 눈치를 살폈다. 민정이 별다른 부정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의사는 다시 민정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는 괜찮아요. 근데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니까, 조심하세요.”

“공연 해도 돼요?”

“공연요? 무슨 공연?”

지민의 돌발 질문에 의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제야 지민은 눈치챘다. 민정이 저번에 혼자 왔을 때, 자신이 드러머라는 것도, 당장 무대를 앞두고 있다는 것도 싹 숨겼다는 사실을. 지민이 기가 찬다는 듯 민정을 바라봤지만, 민정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결국 지민이 대신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음악 공연이요. 밴드요.”

“악기 연주하세요?”

“네.”

의사가 민정의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다시 한번 세밀하게 훑었다.

“드럼 치시나 보네.”

“네.”

“공연이 언제예요?”

“사흘 후요.”

허……. 의사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손목을 이 지경으로 혹사해 응급실까지 왔던 환자가 당장 사흘 뒤에 공연이라니, 의사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공연 당일에만 연주하시는 거면 괜찮아요. 한 시간 정도? 가능은 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전까지는 스틱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공연 당일까지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연습 한 번이라도 더 하면 다시 악화돼요.”

민정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당장 수십 번 맞춰봐도 부족한 판국인데 연습을 하지 말라고?

“……연습을 아예 하지 말라고요?”

“네. 공연 당일에만 치세요. 그것도 중간중간 쉬면서 하시고요.”

“근데 연습을 안 하면……”

“지금 손이 중요해요, 공연이 중요해요?”

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리하면 지금은 급성으로 끝날 게 만성으로 갑니다. 그럼 3년, 길게는 평생 이 통증 안고 사셔야 해요. 주사 맞고, 물리치료 받고, 그래도 안 나으면 수술해야 합니다. 수술해도 예전만큼 회복된다는 보장 없고요.”

민정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의사는 자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손 쓰는 직업이면 더 무서운 줄 아셔야죠. 지금 사흘 쉬는 게 아까우세요, 아니면 평생 드럼 못 치는 게 아까우세요?”

민정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지민이 민정의 오른손을 꽉 맞잡았다. 민정이 놀라 돌아보자,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응원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결국 민정의 입에서 힘겨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의사가 처방전을 내밀며 덧붙였다.

“약 거르지 말고, 내일 물리치료 한 번 더 받으러 오세요. 공연 끝나고도 꼭 다시 오시고요.”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지민이 민정을 빤히 바라봤다.

“공연은 할 수 있대요. 다행이다.”

“응. 근데 연습을 못 하잖아.”

“……언니.”

“응.”

“언니 몸이 다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원래 바디 메모리가 가장 오래 간대요. 그러니까 걱정 마요.”

지민이 활짝 웃었다. 그 해맑은 웃음 뒤로 단호한 선언이 이어졌다.

“연습실은 가도 돼요. 대신 제가 약속 지키는지 지켜볼 거예요.”

“……그게 되겠어? 눈 앞에 드럼이 있는데.”

“돼야죠. 안 그러면 언니 손 또 망가지는데.”

지민이 민정의 오른손을 흔들며 다짐을 받아내려 했다.

“약속해요. 스틱 안 잡기로.”

지민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서, 민정은 결국 패배를 선언하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진짜 약속이에요.”

“어.”

병원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민정이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걷자, 지민이 옆에서 종알거리며 보폭을 맞췄다.

“제가 더 열심히 연습할게요. 언니가 편하게 칠 수 있게 제가 완벽하게 깔아줄게요.”

지민이 주먹을 꽉 쥐어 보이며 장담했다. 민정이 슬쩍 고개를 돌려 지민을 보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지민의 웃음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든든해 보였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의지해 본 적이 있었던가. 낯선 감각이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민정은 왠지 뒷머리가 쑥스러워져 시선을 피하며 작게 웅얼거렸다.

“……그래. 그러든가.”

기대에 찬 지민의 얼굴에 비해 영 떨떠름한 대답이었지만, 민정의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연습실로 향했고, 일주일 만에 새비지 멤버가 다 모였다. 하지만 늘 드럼 의자에 앉아 카운트를 외치던 민정은 오늘따라 대기석 소파에 덩그러니 자리를 잡았다. 드럼 앞에 앉기만 하면 분명 스틱을 쥐고 싶어질 거라며, 지민이 극구 말린 탓이었다. 인혜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민정아, 손은 좀 어때?”

“공연은 할 수 있대. 대신 연습은 절대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멤버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주연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럼 사흘간은 우리끼리 합 맞추는 거네?”

“으응…… 미안하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손 나은 게 다행이지.”

도영이 베이스 줄을 튕기며 신호를 보냈다.

“자, 시작하자. 민정 언니는 옆에서 감독이나 해.”

드럼 비트가 빠진 연습이 시작됐다. 공기가 이상했다. 꽉 차 있어야 할 박자의 뼈대가 빠져나가니 소리들이 자꾸만 허공으로 흩어졌다. 지민은 건반을 누르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민정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인혜가 물을 마시며 혀를 내둘렀다.

“와, 드럼 없으니까 진짜 허전하네.”

“그러게. 박자 기준점이 없으니까 자꾸 절게 돼.”

휴식 후 재개된 연습. 아까 그 주연의 말에 민정은 소파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박자를 셌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거기 템포 틀렸어. 브릿지 들어가기 직전에 너무 빨라.”

“아, 그래?”

도영이 베이스를 다시 짚자 민정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

민정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몸이 가만있질 못했다. 발바닥은 바닥을 두드리고 손가락은 보이지 않는 박자를 허공에 그렸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민정의 손안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드럼 세트 옆에 놓인 스틱 케이스가 오늘따라 유독 번쩍거려 보였다. 그립감만 확인해보면 안 될까. 딱 한 번만. 민정이 소원.

민정이 슬금슬금 일어나 스틱 케이스 쪽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레 손을 뻗으려던 그 찰나였다.

“언니.”

지민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민정은 깜짝 놀라 손을 뒤로 감췄다. 건반 앞에 앉은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민정을 째려보고 있었다. 저놈의 수달이 또 애착 돌맹이 지키듯이 스틱을 지킨다.

“아니, 그냥...… 자리 좀 옮기려고.”

“약속했잖아요.”

“……알았어.”

민정은 입을 삐죽이며 다시 소파로 돌아갔다. 그 꼴을 지켜보던 인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민정아, 손 근질거려 죽겠지?”

“……어.”

“민정 언니.”

주연이 기타 줄을 고르며 툭 던졌다.

“언니가 그동안 수천 번을 친 곡이야. 고작 사흘 안 쳤다고 공연 망칠 것 같아? 불안하면 그냥 에어 드럼이나 쳐.”

“에어 드럼?”

“어. 섀도우 복싱 하듯이 허공에 대고 휘두르라고.”

민정은 하는 수 없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대고 스네어와 하이햇을 치는 시늉을 했다. 스틱의 무게감도, 림을 때리는 쾌감도 없었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았다. 민정은 멤버들의 소리에 집중하며 허공을 갈랐다. 지민은 연습 도중 힐끗 본 민정의 진지한 얼굴에 웃음이 났다. 저 언니, 진짜 드럼 없으면 못 살지.

연습이 끝나고 멤버들이 짐을 챙길 때, 민정은 드럼 세트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곤 마치 애완동물을 어루만지듯 스네어 드럼의 매끈한 피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지민이 어느새 그 곁으로 다가왔다.

“언니, 그렇게 걔가 보고 싶어요?”

“……어.”

“조금만 참아요. 공연 날엔 원 없이 치게 해줄게요.”

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지민이 민정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언니, 오늘 저 연습하는 거 봤죠? 저 되게 잘하지 않았어요?”

“……잘하더라.”

“내일은 더 잘할 거예요. 기대해요.”

지민이 활짝 웃자, 민정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민정은 여전히 근질거리는 왼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그래. 부탁한다.”

그렇게 허공만 맨손으로 쓰다듬으며 버틴 사흘이 지나고, 마침내 공연 당일이 되었다.

민정은 오후 늦게야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기울어진 햇살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정신이 들기도 전에 왼손부터 움직였다. 손가락을 펴고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통증은 없었다. 뻑뻑하던 감각도 사라지고 손가락은 부드럽게 공기를 갈랐다. 민정은 침대에 앉아 천천히 심호흡했다.

오늘이다. 오늘 잘하면 락 페스티벌, 혹은 그 이상의 기회가 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망치면 모든 게 끝이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지민의 메시지였다.

> 언니 일어났어요?

> 방금 일어났어

> 손은요?

> 괜찮아

> 거짓말 금지!

> 진짜 괜찮아요?

> 진짜 괜찮다니까

> 다행이다ㅠㅠ

> 오늘 우리 잘할 거예요!

> ㅇㅇ

무심하게 답장을 보냈지만 민정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번졌다.

클럽 어비스 대기실. 멤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민정은 평소와 달랐다. 거친 질감의 검은 가죽 자켓에 은색 체인 목걸이를 겹쳐 걸친 모습은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손목에서 빛나는 스터드 팔찌와 입술에 끼운 립 커프가 오늘 민정의 각오를 대변하는 듯했다.

곧이어 지민이 들어왔다. 지민 역시 평소의 단정함을 벗어던진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검은 슬릿 원피스 위에 오버사이즈 가죽 자켓을 걸치고 굵은 실버 체인을 늘어뜨린 지민은 묘하게 민정과 닮아 있었다.

“와, 언니. 완전 달라 보여요.”

“너도.”

민정이 지민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평소의 모범생 같은 옷차림과는 다른 지민의 화려한 모습이 낯설면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늘 다들 제대로 차려입기로 했으니까. 잘 어울ㄹ……”

“와. 너네 뭐냐?”

민정의 뒷말은 대기실이 떠나가라 외치는 인혜의 목소리에 맥없이 묻혀버렸다. 누가 보컬 아니랄까 봐 성량이 어마어마했다. 인혜는 새빨간 립스틱에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본인의 목소리만큼이나 강렬한 레드 가죽 자켓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뒤로 주연과 도영 역시 브라운 계열의 가죽 자켓과 메탈 액세서리로 중무장한 채 나타났다.

“둘이 맞추기라도 했어? 웬 커플 룩이야?”

인혜의 장난스러운 말에 민정과 지민의 시선이 동시에 서로에게 향했다. 정말로 똑같은 검은 가죽 자켓이었다. 사이즈만 다른 것 같다.

“나 이거 원래 있던 건데.”

“저도요. 오늘 입으려고 새로 산 거예요.”

“진짜 신기하다. 체인 목걸이까지 세트 같은데? 계획한 거 아니야?”

주연과 도영까지 가세하자 지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라니까요!”

지민이 손사래를 쳤지만, 민정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가죽 자켓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우연이야.”

“우연치고는 너무 똑같은데? 난 빨간색이고 얘네는 갈색이잖아.”

인혜가 픽픽 웃으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뭐, 보기엔 좋다. 우리 팀 통일감 있어 보이고. 특히 너네 둘.”

“언니!”

지민이 민망해하자 민정이 인혜를 쏘아보며 말을 잘랐다.

“그만하고, 시작 전에 집중 좀 하자.”

“알았어, 알았어.”

인혜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계속 민정과 지민을 번갈아 보며 픽픽 웃었다.

“언니.”

지민이 민정 옆에 앉아 민정의 왼손을 봤다.

“손 괜찮아요?”

“응. 아까 집에서 조금 쳐봤는데 괜찮더라.”

“언니! 연습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연습 아니야. 딱 한 번이었어. 16비트 8마디에 필인 하나. 손목 스냅 돌아가는 건 확인해야 무대에 올라가지.”

지민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민정은 그런 지민의 어깨를 툭툭 치며 안심시켰다.

“오늘 공연 끝나고 또 아프면 어떡하려고요.”

“안 아플 거야. 괜찮아. 걱정마.”

그때 도영이 베이스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관객 진짜 많이 올 거래. 내 친구들도 락페 기획자들 온다니까 다들 구경 온다더라고.”

“압박 쩌는데?”

주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정을 살폈다.

“언니, 진짜 괜찮겠어?”

“괜찮아. 평소처럼만 하면 돼.”

민정이 덤덤하게 대답하며 스틱 케이스의 지퍼를 열었다. 가지런히 꽂힌 여러 쌍의 스틱 중에서도 유독 손때가 타서 거뭇해진 낡은 스틱 한 쌍을 꺼내 들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메인 스틱이었다. 손잡이 부분에는 검은색 그립 테이프가 촘촘하게 감겨 있었다. 왼손에 가해지는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민정이 어젯밤 몇 번이나 뜯었다 다시 감으며 공을 들인 결과물이었다.

민정은 테이프가 감긴 부분을 꽉 쥐어보았다. 고무 재질의 쫀득한 촉감이 부어올랐던 손바닥에 착 감겼다. 일주일 만에 느껴보는 익숙하고도 든든한 무게감.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안도감에 민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운드 체크 할게요! 드럼부터!”

엔지니어의 목소리에 멤버들이 무대로 나갔다. 드럼 세트 앞에 앉는 순간, 민정은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일주일 만에 앉아보는 드럼 의자, 익숙한 구도로 배치된 심벌과 탐들. 민정은 조심스럽게 오른쪽 페달을 밟았다.

쿵-!

킥 드럼의 묵직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거칠게 때렸다. 이어 왼손에 쥔 스틱으로 스네어를 내리쳤다.

탁!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기분 좋은 반동이 손목으로 되돌아왔다. 민정은 눈을 감고 그 감각을 음미했다. 다행히 통증은 없었다. 어젯밤 공들여 감아둔 그립 테이프가 손바닥에 쫀득하게 달라붙어 충격을 흡수해주고 있었다.

“민정아, 템포 좀 줘봐. 맞춰보게.”

인혜의 요청에 민정이 가볍게 비트를 새기기 시작했다. 8비트 기본 리듬부터 시작해, 슬쩍 16비트 필인까지 섞어 보았다. 일주일간 허공을 휘두르며 상상했던 그 궤적 그대로 스틱이 움직였다.

지민은 건반 앞에 서서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드럼 앞에 앉은 민정은 방금 대기실에서 자신을 안심시키려 애쓰던 사람과 전혀 딴판이었다. 서늘하고, 압도적이며, 생동감이 넘쳤다. 그래, 그게 바로 새비지의 드러머, 김민정이었다.

짧은 리허설이 끝나고 다시 찾아온 대기 시간. 민정은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며 방금 전 사용했던 왼손의 감각을 예민하게 살폈다. 지민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언니.”

“응.”

“긴장돼요.”

“나도.”

“언니도 긴장돼요?”

“당연하지. 맨날 긴장돼.”

민정이 지민을 봤다.

“근데 무대 올라가면 괜찮아질 거야. 항상 그랬어.”

“……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이 지민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 잘하자. 우리 준비 많이 했잖아. 아니, 나 말고 너네가.”

“언니도 허공에다 대고 피 터지게 준비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다 같이요.”

히죽 웃는 지민의 모습에 민정도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객석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대기실 모니터에 비친 관객석은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락페 기획자들이 어디쯤 앉아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기였다. 민정은 말없이 스틱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왼손이 아주 미세하게 뻐근했지만, 아드레날린 덕분인지 충분히 견딜 만했다.

“새비지, 5분 뒤 시작합니다!”

스태프의 호출에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로 향하는 어두운 복도, 민정이 앞장섰다. 가죽 재킷 위로 체인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리듬처럼 들렸다. 무대 입구에서 민정은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뒤에서 지민이 바라본 민정의 어깨는 작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 보였다.

“새비지, 입장하세요!”

눈부신 조명 아래로 걸어 나가자 터질 듯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민정은 드럼 의자에 앉아 스틱을 고쳐 쥐었다. 빼곡한 관객들 사이 어딘가에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이들이 있다. 민정의 심장이 엔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건반 앞에 선 지민과 시선이 마주쳤다. 민정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잘하자.

지민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혜가 마이크를 잡고 관객을 압도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세요, 우린 새비지입니다!”

객석이 들썩였다. 민정이 스틱을 높이 들어 올렸다. 멤버들의 눈빛이 하나로 모였다. 민정의 카운트가 정적을 찢고 터져 나왔다.

“원, 투, 쓰리, 포!”

첫 곡은 ‘싱크 아웃’. 빠르고 거친, 새비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시그니처 곡이자 오프닝이었다. 들으면 ‘아, 이게 새비지구나’ 할 수 있는 곡 말이다.

민정의 스틱이 단단한 공기를 찢으며 내리꽂혔다. 쿵-! 육중한 킥 드럼이 객석 바닥을 정면으로 때렸고, 그 진동은 관객들의 발바닥을 타고 올라가 가슴팍을 거칠게 흔들었다. 이어지는 스네어의 날카로운 파열음과 하이햇이 잘게 쪼개는 금속성 비트. 민정의 연주는 폭발적이었다. 일주일간 억눌렸던 모든 갈증이 스틱 끝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지민의 손가락도 건반 위로 쉼 없이 내려앉았다. 정박을 찍어 누르는 강렬한 코드워크. 페달을 밟지 않은 채 음을 짧고 단호하게 끊어내자, 민정이 깔아준 비트 위로 건반이 날을 세우며 달렸다. 주연의 기타가 비명처럼 허공을 찢고, 도영의 베이스가 어둡고 묵직하게 바닥을 긁어냈다. 그 모든 소리의 정점에서 인혜의 허스키한 음색이 칼날처럼 꽂혔다. 일주일간 묵혀둔 에너지를 뿜어내는 민정도 민정이었지만, 다른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럼 비트 하나 없는 연습실에서 텅 빈 박자를 억지로 채우며 견뎌온 일주일. 그 기나긴 갈증이 민정의 첫 타격과 동시에 폭발하고 있었다. 완벽한 뼈대 위로 살점이 붙고 피가 도는 감각. ‘새비지’라는 거대한 짐승이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포효하고 있었다.

객석이 요동쳤다. 지민은 처음에 그게 자신만의 환각인 줄 알았으나, 진짜로 무대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맨 앞줄 관객들은 일제히 주먹을 치켜들었고, 뒷줄 사람들까지 고개를 까닥이며 몸을 맡기자 테이블과 의자들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클럽 어비스의 낮은 천장 아래로 소음이 부딪치고 튕겨 나가며 거대한 음압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지민은 그 파도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졌다. 앰프를 타고 증폭된 소리가 제 손끝에서 시작되어 객석 끝까지 뻗어 나가는 감각이 온몸의 전율로 이어졌다.

민정은 이를 악물고 비트를 밀어붙였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 눈가에 맺혔지만 닦을 겨를조차 없었다. 찌릿, 하고 왼손에서 예리한 통증이 고개를 들었으나 민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고통을 비웃듯 스틱을 쥔 손에 더 힘을 줬다. 어젯밤 감아둔 그립 테이프가 땀에 젖어 쫀득하게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민정의 시선이 어두운 객석을 훑었다. 저 어딘가에 있을 페스티벌 기획자에게 증명해야 했다. 이것이 우리고, 이것이 새비지라는 것을.

첫 곡이 끝나자마자 고막을 찢는 듯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민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왼손의 감각이었다. 아직은 버틸 만했다. 지민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민정과 눈이 마주쳤다.

민정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혹은 계속 그렇게 가자는 무언의 신호. 지민 역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곡, ‘코스모’. 템포는 한층 더 가팔라졌다. 민정의 오른발이 킥 페달 위를 질주하듯 미친 듯이 밟아댔다. 쿵쿵쿵쿵! 고막을 조여오는 리듬에 맞춰 관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쿵-짝, 쿵-짝. 클럽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타악기가 되어 고동치고 있었다.

지민은 쉴 새 없이 건반을 두드리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 위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고 신기했다. 클래식 무대에 서던 시절의 지민은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다. 늘 정해진 음표 하나라도 틀릴까 봐 숨이 막히는 압박감에 짓눌려 있었고, 곡의 비극적인 감정을 짜내기 위해 얼굴을 잔뜩 찌푸리거나 울상을 짓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조금 틀리면 어떠랴, 민정이 받아줄 텐데. 뒤에서 민정의 드럼이 강철 같은 뼈대가 되어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는 확신. 그 해방감이 지민을 춤추게 했다.

세 번째 곡으로 넘어갔다. ‘다잉 스타.’ 전곡들의 열기를 식히듯 템포가 뚝 떨어졌다. 전 멤버였던 세미가 팀을 떠나고, 민정이 가장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을 때 쓴 곡이었다. 지루하고 나른해서, 마치 수명이 다한 별처럼 이대로 서서히 꺼져가고 싶다는 가사가 지민의 건반 선율 위로 흘러나왔다.

인혜의 보컬이 몽환적으로 전면에 나섰고, 지민은 건반에 실었던 힘을 빼고 공허한 코드만을 툭툭 깔았다. 그러자 민정의 연주도 색깔을 바꿨다. 날카로운 스틱 대신 부드러운 브러쉬를 쥐고 심벌을 살살 쓰다듬듯 문질렀다.

차르륵, 차르륵. 모래사장을 핥고 지나가는 파도 소리 같은 마찰음이 클럽을 메웠다. 거칠게 날뛰던 객석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민정이 설계한 우울한 성운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

민정은 연주하며 지민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건반 앞에 선 지민의 어깨가 리듬에 맞춰 느릿하게 흔들렸다. 검은 가죽 재킷 위로 늘어진 은색 체인이 푸른 조명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민정은 문득 생각했다. 쟤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겠지. 이 곡을 쓸 때만 해도 정말 죽어가는 별처럼 끝이라 생각했는데. 일주일 동안 제 손발이 되어 밥을 해주고, 지극정성으로 손을 치료해주고, 때로는 단호하게 연습을 막아서던 지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지독했던 간섭 덕분에 민정은 지금, 다시 스틱을 쥐고 무대 위에 서 있다.

네 번째 곡. ‘블로우 업’. 셋리스트를 짤 때부터 반드시 이 순서여야 한다는 격론이 오갔을 만큼, 앞선 곡으로 나른하게 늘어졌던 텐션을 다시 팽팽하게 끌어올리는 새비지의 기폭제 같은 곡이었다. 급격히 템포가 치솟았고, 민정의 손도 그에 맞춰 가속도를 붙였다.

그 순간, 왼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비명처럼 확 올라왔다. 민정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채 터져 나오려는 신음 대신 스틱으로 스네어를 후려쳤다. 탁, 탁, 타닥! 손목 안쪽에서 시뻘건 불길이 이는 것만 같았다.

지민이 가장 먼저 그 변화를 감지했다. 칼날 같던 민정의 박자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한 걸 좋아하는 민정에게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민은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쉼 없이 놀리며 뒤를 힐끗 살폈다. 민정의 얼굴이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파하고 있어.

지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곡이 끝나고 잠시 호흡을 고르는 멘트 타임. 인혜가 관객들과 능청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호응을 유도하는 사이, 지민이 재빨리 건반 앞에서 일어나 민정에게 다가갔다.

“언니, 괜찮아요?”

“괜찮아.”

“거짓말.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조금 뻐근해. 근데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민정은 스틱을 쥔 채 손을 펴고 오므려 보았다. 하지만 손끝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쉬어요. 제가 템포 잡을게요.”

“안 돼. 드럼 비트 없이 어떻게 곡을 끌어가......”

“언니가 깔아준 비트 위에서 제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잊었어요? 저 믿으라고요. 네?”

지민이 민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신입 티를 벗지 못해 매사 어벙하고, 동글동글한 눈매가 영락없는 새끼 수달 같아서 늘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했던 지민이었다. 하지만 지금 민정을 쳐다보는 지민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견고했다.

민정은 잠시 망설였으나, 어느덧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만큼 든든하게 자라난 지민의 확신에 결국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한 곡만.”

“네. 한 곡만요.”

지민이 안심시키듯 살짝 웃어 보이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민정은 떨리는 손목을 가죽 재킷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항상 자신이 앞에서 끌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민의 어깨에 잠시 기대어도 괜찮겠다는 묘한 안도감이 통증 사이로 스며들었다.

다섯 번째 곡이 시작됐다. 곡 제목은 ‘유어 타임’. 제목 그대로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지민이었다. 평소라면 민정의 스틱이 먼저 공기를 갈랐겠지만, 이번에는 지민의 건반이 먼저 고요한 정적을 깨고 들어왔다. 지민이 템포를 잡으면 민정의 드럼이 그 뒤를 따르는 방식. 역할의 역전이었다.

민정은 처음엔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늘 선두에서 밴드를 거칠게 견인하는 역할만 해왔기에,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감각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지민의 건반은 민정의 우려와 달리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고, 안정적이며, 무엇보다 굳건하게 믿을 수 있었다.

민정은 뻣뻣하게 세웠던 어깨의 힘을 조금씩 뺐다. 지민이 탄탄하게 깔아둔 건반 선율 위로 드럼 비트를 가볍게 얹어 나갔다. 왼손의 타격 강도를 낮추고 오른손 위주로 연주를 이어가자, 비명 지르던 손목의 통증도 한결 가라앉았다.

민정은 연주하는 내내 지민의 등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깨로 밴드 전체의 무게를 짊어진 채 꿋꿋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지민의 뒷모습.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진심이 스틱 끝을 타고 부드러운 리듬이 되어 흘러 나갔다.

드디어 마지막 곡. ‘마이 빅토리’. 이름 그대로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곡이었다. 민정이 다시 스틱을 고쳐 쥐었다. 마지막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했다.

“원, 투, 쓰리, 포!”

카운트와 동시에 폭발음 같은 연주가 터져 나왔다. 민정의 드럼이 광기 어린 속도로 무대를 몰아쳤다. 왼손목이 타들어 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지금은 고통조차 사치였다. 스틱을 휘두를 때마다 땀방울이 조명 빛을 받아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지민은 민정을 보았다. 민정은 마치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것처럼 한계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지민 역시 건반 위로 손가락을 날리며 사력을 다했다. 민정을 저 고독한 사투 속에 혼자 둘 수는 없었다. 파괴되더라도 우리 같이 파괴돼요. 지민은 그런 각오로 건반을 찍어 눌렀다. 마침내 찾아온 클라이맥스, 한계에 다다른 민정의 왼손이 미세하게 뒤틀리며 박자가 밀려 나간 그 찰나였다.

민정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민의 건반이 본능적으로 민정의 어긋난 틈새를 파고들어 박자를 가로챘다. 그리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민정의 실수와 지민의 임기응변을 감지한 주연과 도영이 짠 것처럼 동시에 리듬을 틀어 지민의 건반 위로 올라탄 것이다.

어긋난 톱니바퀴는 무너지는 대신, 밴드 전체의 호흡을 타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궤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인혜의 목소리가 그 낯설고도 완벽한 합 위로 전율처럼 쏟아졌다.

혼자서는 무너졌을 순간이, 함께였기에 세상에 없던 연주로 재탄생했다. 개인은 불완전했으나, 그 결핍들이 서로의 빈틈을 맞물려 채우는 순간 새비지는 비로소 완벽해졌다. 민정이 번뜩 고개를 들어 멤버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뜨겁게 웃고 있었다.

챙-! 마지막 심벌이 무대를 가르고 길고 진한 여운이 객석을 채웠다. 민정은 경련하는 손에서 스틱을 내려놓았다. 해냈다. 아니, 우리가 해냈다. 개인의 완벽함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눈부신, ‘우리’라는 이름의 완벽함이 그곳에 있었다.

벅찬 표정의 지민이 달려와 민정을 꽉 껴안았고, 뒤이어 주연과 도영, 인혜까지 한데 엉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언니! 우리 진짜 해냈어요!”

“어. 진짜 했네, 우리. 김민정 손목 블로우 업 될 때 망하는 줄 알았는데! 와우! 유지민!”

“유어 타임은 이제 제 겁니다.”

“그래, 네 거 해라. 작곡은 김민정이 했지만.”

민정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지민을 마주 안았다. 왼손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렸기에 오직 오른팔에만 힘을 실어 지민을 꽉 끌어당겼다. 지독한 통증조차 행복이라는 감정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무대를 내려오는 길, 멤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땀에 젖어 끈적이는 몸과 거친 숨소리가 뒤섞였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모두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조명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스태프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새비지 팀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어요. 끝나고 잠깐 만나고 싶대요.”

순간 대기실에 정적이 흘렀다. 멤버들이 서로의 눈을 확인했다. 가장 먼저 인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정적을 깼다.

“됐다! 우리 진짜 사고 쳤어!.”

“와…… 우리 이제 진짜로 이 짓 계속하고 살 수 있는 거야?”

주연과 도영이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며 날뛰었다. 민정은 벽에 기대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그때 지민이 다가와 민정의 손을 잡았다. 아픈 왼손이 아닌, 떨림이 멈추지 않는 민정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언니, 우리 진짜 락 페스티벌 가는 거예요?”

“……아마도, 그런 것 같네.”

민정이 지민을 돌아보았다. 지민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은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민정은 그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이 완벽한 팀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도 따라 웃었다. 이제 더 이상 ‘다잉 스타’ 같은 무력감은 없었다.

페스티벌 기획자들과의 미팅은 생각보다 짧고 강렬했다. 새비지의 공연을 본 순간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찬사와 함께, ‘락 페스티벌 메인 무대 출연 확정’이라는 소식이 떨어졌다. 꿈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대기실로 돌아온 멤버들은 서로를 껴안고 터져 나오는 함성을 참지 못했다. 인혜가 가장 먼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야, 우리 이거 그냥 못 넘어간다! 오늘 회식 뭐로 할까? 치킨? 삼겹살? 너희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무조건 고기! 소고기 먹자, 소고기!”

도영의 환호에 주연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맞장구를 쳤다.

“오늘 같은 날은 진짜 제대로 허리띠 풀고 먹어야지. 민정 언니도 당연히 갈 거지?”

민정은 벽에 기대어 동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투명했던 미래에 한 줄기 빛이 비치자, 다들 얼굴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하지만 왼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전선이 타들어 가듯 예리한 통증이 번져 나갔다. 민정은 파리해진 낯빛 위로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나는 패스. 손 좀 쉬게 해줘야 할 것 같아.”

“에이, 민정아. 오늘 같은 날 어떻게 혼자 집에 가?”

“괜찮아. 너희끼리 가. 나 대신 많이 먹어.”

지민이 민정의 옆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창백해진 안색과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주무르는 손길. 지민은 망설임 없이 짐을 챙겨 들며 입을 열었다.

“저도 민정 언니랑 같이 병원 들렀다가 들어갈게요.”

“야, 유지민. 너까지 안 가면 회식 분위기 안 사는데……”

“언니들끼리 맛있게 드세요. 저 진짜 괜찮으니까.”

지민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인혜가 민정과 지민을 번갈아 보더니,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너희 둘은 오늘 예외다. 우리끼리 갈 테니까 민정이 손목 잘 모셔라. 야, 김민정. 너는 유지민 말 잘 듣고. 쟤가 너 챙긴다고 고생 많았잖아.”

폭풍 같은 멤버들이 짐을 챙겨 떠나자, 대기실에는 가라앉은 정적과 함께 민정과 지민만 남았다. 민정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왼손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열감이 오르며 붓기 시작한 손등이 오늘 무대의 치열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민은 소파에 앉은 민정의 곁에 조심스럽게 다가앉았다. 텅 빈 대기실의 정적 속에서 민정의 거친 숨소리와 붓기 시작한 손목만 도드라져 보였다. 지민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민정의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가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언니, 일단 병원부터 가요. 지금 안 가면 내일 아예 못 움직일지도 몰라요.”

민정은 대답 대신 신음 섞인 숨을 뱉었다. 사실 병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해일처럼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은 그런 민정의 상태를 읽어낸 듯,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차가운 생수를 적셔 민정의 손등에 얹어주었다.

“아까 무대 위에서요. 언니 박자 밀렸을 때 저 진짜 하나도 안 불안했거든요.”

민정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봤다. 지민은 평소처럼 어벙하게 웃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진지하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냥 ‘아, 내가 이 부분은 커버치면 되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언니 손 아픈 거 뻔히 보이는데도 꾹 참고 있는 게 불안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손 아픈 거 나한테 숨기지 마요. 언니가 완벽하지 않아도 제가 채울 수 있게 연습 많이 할 테니까.”

지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민정의 손등을 덮은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지민의 진심인 것 같아 민정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너, 언제 이렇게 컸냐?”

“언니 모시고 사느라 제가 고생 좀 했잖아요. 보호자 노릇도 체질인가 봐요. 자, 가요. 제가 가방 멜게요.”

지민은 민정의 가방까지 양어깨에 둘러메고는 민정을 부축해 일으켰다. 민정은 지민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대기실을 나섰다. 평소라면 ‘환자 취급 말라’며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지민이 내어준 어깨가 너무 따뜻해서 가만히 기대고 싶었다.

두 사람은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인대 파열 같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검진을 마친 의사-이번에도 같은 의사였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일주일 전보다 조금 더 악화됐네요. 오늘 공연이시라더니, 무리하셨죠?

“……네.”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하세요. 지금은 쉬면 낫지만, 자꾸 이러면 만성으로 갑니다. 드럼 계속 치실 거잖아요.”

처방전을 받아 들고 응급실을 나오는 길. 차가운 새벽 공기가 닿자 민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안.”

“왜요?”

“너까지 고생시켜서.”

지민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하나도 안 힘들어요. 언니가 무사히 무대 끝내서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민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새벽 두 시, 거리는 한산했고 가로등 불빛만 빠르게 뒤로 밀려 나갔다.

“언니, 오늘 정말 멋있었어요.”

“그래?”

“네. 마지막 곡 때, 박자 어긋났을 때요.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민정이 미안한 기색으로 지민을 보았다.

“미안. 실수했어.”

“아니에요. 제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라……”

지민이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민정의 박자가 흔들렸던 그 찰나, 지민은 공포가 아니라 기묘한 뜨거움을 느꼈다. 항상 무결점의 벽 같았던 민정의 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그 빈 곳을 메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지어졌다.

내가 이 사람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오만이 아니라, 지민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지독한 간절함이었다. 자신이 민정에게 필요한 조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지민은 그 깊은 속마음을 차마 다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 제가 언니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무대 위에서요.”

민정의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제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한 지민의 눈빛은 방금 전 의사의 경고보다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지민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래서 저, 언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

“저……”

그 순간 택시가 멈춰 섰다. 민정의 집 앞이었다. 지민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무슨 말인데?”

“아니에요. 나중에 할게요.”

“야, 말하다 말고 뭐야.”

지민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른 들어가세요. 밥 먹고 약 드셔야죠.”

“너는?”

“저도 이제 집에 가야죠.”

민정이 차에서 내리자 지민도 따라 내렸다. 민정은 가로등 불빛 아래 선 지민을 바라보았다.

“오늘 진짜 고마웠어.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민정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드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제나 빈틈없이 땜질된 벽처럼 단단하기만 했던 사람. 약한 소리 한 번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세워온 그 철벽 같은 방어기제 너머로, 오직 지민만이 아는 부드러운 속살이 비친 순간이었다.

그 다정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지민의 흉곽 안이 통제 불능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틈을 놓치면, 다시는 저 벽 너머로 발을 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지민을 등 떠밀었다.

“언니.”

“응.”

“저…… 언니 좋아해요.”

밤공기를 가르고 떨리는 고백이 하얀 입김과 함께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옷깃을 파고드는 시린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깊은 고요였다.

“……뭐?”

“좋아해요. 그냥 선배나 밴드 동료로서가 아니라, 그…… 진짜로요.”

가로등 불빛조차 무색할 만큼 지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민정이 무슨 말을 잇기도 전에, 지민이 당황해 말을 쏟아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말 해서! 근데 오늘 말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아,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세요!”

지민은 제 심장 소리가 민정에게까지 들릴까 봐 겁이 나, 제풀에 겨워 뒷걸음질을 쳤다.

“야, 잠깐만……”

“저 먼저 갈게요!”

지민이 그대로 몸을 돌려 전력 질주로 뛰기 시작했다. 민정이 손을 뻗었지만 지민은 이미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야! 유지민!”

민정의 부름에도 지민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텅 빈 골목에 홀로 남겨진 민정은 멍하니 지민이 사라진 잔상을 바라보았다.

민정은 제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지민의 고백이 휩쓸고 간 자리에 미친 듯한 심장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뭐야, 이거.”

다음 날부터 지민은 민정을 피했다. 연습실에는 정시에 맞춰 나타났다. 하지만 민정과 결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인사도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한마디가 끝이었다. 평소라면 언니 손 괜찮아요? 어제 잘 주무셨어요? 약은 챙겨 먹었죠? 병원 갔다 왔어요? 같은 질문을 쏟아냈을 텐데, 지민은 건반 앞에 앉아 악보만 들여다봤다. 민정은 그게 신경 쓰였다. 아니, 미칠 노릇이었다. 연습 중간, 습관적으로 손목을 주무르다 멈칫했다. 원래 이 타이밍이면 지민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와 아직 다 나은 거 아니니까 무리하지 말라며 시원한 물병을 건네거나 제 손을 가져가 주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민은 미동도 없었다. 텅 빈 옆자리를 확인한 순간, 민정은 깨달았다. 지난 며칠간 제가 누린 건 간호가 아니라 지민의 온전한 애정이었다는 걸. 지민이 거둬간 건 단순한 수발이 아니라, 민정이 저도 모르게 기대고 있던 안식처였다.

페스티벌에 나가기로 했으니 연습량도 당연히 늘어났다. 준비할 기간적 여유는 있지만 새 곡도 필요하고, 그에 따라 연습이 배는 필요했다. 무대 위의 완벽한 합을 위해 서로의 호흡 하나하나에 예민해져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니 지민의 이 기묘한 태도를 다른 애들이 눈치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습실의 공기가 평소보다 몇 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합주 내내 지민이 민정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건반만 누르고 있었으니까. 결국,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주연이 팔짱을 끼며 민정에게 물었다.

“민정 언니.”

“왜.”

“언니 어제 지민이랑 싸웠어?”

“아니.”

“그럼 왜 저래? 지민이가 완전 피하잖아. 쟤가 저런 적 없는데.”

“……모르겠어.”

주연이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지민을 흘끔 보다가 다시 물을 마시러 갔다. 그때 인혜가 슬금슬금 다가와 민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야.”

“뭐, 넌 또 왜.”

“고백했어? 아니면 고백 받고 도망쳤어?”

민정이 화들짝 놀라 인혜를 쳐다봤다. 인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병을 들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떻게……”

“야, 나 배인혜다. 너네 티 개많이 나. 모르는 애들이 눈이 없는 거지.”

“……아무 말 하지 마.”

“알았어. 근데 빨리 쟤 좀 어떻게 해. 이 분위기로 락페 어떻게 갈래?”

인혜가 민정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민정은 멍하니 서 있다가, 건반 앞에 앉아 있는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여전히 악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 진짜 모르겠다……”

민정은 정말 몰랐다. 아니, 알긴 아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민이 고백한 뒤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좋아한다고? 나를? 진짜로? 쟤가 날 좀 따르는 건 알았지만, 그게 그런 마음일 줄은 몰랐다.

민정은 그날 밤, 냉장고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지민이 만들어둔 반찬 통이 그대로 있었다. 공연 전전 날, “언니 혼자 있으면 과자만 먹잖아요”라며 억지로 떠먹이던 된장찌개. 민정은 통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2분이 지나도 돌아가는 그릇만 멍하니 바라봤다.

이틀째 되는 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민정이 먼저 말을 걸었다.

“지민아.”

“네.”

지민이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 이제 손 괜찮은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진짜?”

“네.”

그게 전부였다. 지민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민정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지민의 정수리만 바라보았다.

진짜 그게 전부라고? 내 손목 다친 거 가지고 세상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떨며 응급실로 끌고 가려고 하고, 일주일 내내 사육하듯 밥을 챙기러 제 집까지 쳐들어왔던 애가. 그저, 다행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지민의 그 건조한 대답은 민정의 마음속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는 수준이 아니라, 가슴 한구석을 쿡 찌르는 불쾌한 통증으로 변했다. 지민이 쏟아붓던 과할 정도의 다정함에 어느새 중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민정은 지민의 차가운 등을 보며 뼈저리게 실감했다.

사흘째, 민정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연습이 끝나고 지민이 또 먼저 나가려 하자 민정이 지민의 손목을 낚아챘다.

“야.”

“네?”

”나랑 얘기 좀 하자.”

“저 바빠서요.”

“뭐가 바빠?”

지민이 손목을 빼내려 했지만 민정은 더 세게 쥐었다. 매일 드럼 스틱을 휘두르는 사람의 아귀힘을 지민이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지민은 결국 포기한 듯 민정을 바라보았다.

“그냥요.”

“유지민.”

“놔주세요.”

“안 놔. 얘기하기 전엔.”

지민의 눈이 빨갰다. 울었나? 민정의 가슴이 철렁했다.

“왜 울어?”

“안 울었어요.”

“거짓말. 너 눈 빨개.”

“……그냥 놔주세요.”

지민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는 바람에 민정은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야, 나……”

“언니!”

지민이 소리쳤다. 연습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지민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뱉었다.

“저 진짜 지금 언니 얼굴 보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제발 좀 내버려 둬요.”

지민이 돌아서서 나갔고, 문이 쾅 닫혔다. 인혜와 주연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지만 민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민이 고백했고, 자신은 아무 대답도 못 했고, 그 뒤로 지민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나흘째, 지민은 연습에 오지 않았다. 연습실 건반 앞이 텅 비어 있었다. 민정은 드럼을 치다 말고 자꾸 그쪽을 힐끗거렸다. 지민이 없으니 박자가 이상하게 공허했다. 아니, 박자는 정확했다. 문제는 그 정확한 박자 위를 채워줄 건반 소리가 없다는 것. 결국 연습을 일찍 접은 민정은 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 어디야

> 연습 안 와?

> 야 유지민

읽음 표시는 떴지만 답장은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신호음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세 번째 전화를 걸려 할 때 문자가 왔다.

> 죄송해요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쉴게요

> 어디 아파?

> 괜찮아요

> 푹 쉬면 나을 것 같아요

> 병원 가봐

> 네

그게 끝이었다. 민정은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화가 나는데, 이상하게 무서웠다. 고백을 들었을 땐 당황스러움이 컸다. ‘귀여운 동생이 선을 넘었네’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흘. 고작 나흘간 지민이 사라졌을 뿐인데 세상이 고요해졌다. 드럼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고, 혼자 있는 집은 지독하게 넓었다. 지민이 정말로 제 인생에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건 절대로 ‘동료’를 잃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 따위가 아니었다.

민정은 닷새째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민과의 마지막 대화창이 떠 있었다.

> 괜찮아요 푹 쉬면 나을 것 같아요

읽음 표시가 붙은 지 이미 12시간. 민정은 메시지 입력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뭐라고 쓸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보고 싶다’고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네 글자가 의미하는 게 뭔지 인정하기 무서웠다.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민정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드럼 스틱을 쥐고 허공을 쳤다. 에어 드럼. 지민이 보면 웃었을 것이다. “이 언니는 진짜 드럼 없으면 못 살지”라며 마음에 드는 돌멩이를 주운 수달처럼 웃었을 것이다. 민정은 그 웃음이 보고 싶었다. 그 웃음을 위해서라면 드럼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그 웃음을 위해 드럼을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민이 다시 연습실에 왔다. 하지만 여전히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굴었다. 민정은 참지 못하고 연습 중간에 스틱을 내려놓았다.

“잠깐 쉬자.”

민정은 지민에게 걸어가 손목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복도 한가운데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야.”

“……네.”

“너 왜 나 피해?”

“안 피했어요.”

“거짓말. 닷새 동안 나랑 제대로 말도 안 했잖아.”

“……할 말이 없어서요.”

“할 말 없기는. 너 나한테 고백해 놓고 도망간 거잖아.”

지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왜 도망가? 내 대답도 안 듣고?”

“……들어봤자 뻔하잖아요.”

“뭐가 뻔해?”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또 빨갛게 젖어 있었다.

“언니가 뭐라고 할지 다 알아요. 미안하다고, 그냥 동료로 지내자고, 그런 감정 없다고. 그렇게 말할 거잖아요.”

민정은 입을 열려다 멈췄다. 지민이 옳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분명 거절할 생각이었다. 밴드에 방해되니까, 넌 너무 어리니까, 나는 연애 같은 거 할 생각 없으니까. 수만 가지 이유를 대며 도망칠 준비를 했던 건 지민이 아니라 민정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민의 저 빨간 눈동자를 보는 순간, 쌓아 올린 변명들이 단숨에 무너졌다. 지민과 눈 한 번 맞추지 못한 채 각자의 박자만 쪼개는 무대? 그건 승리가 아니었다. 지민의 호흡이 섞이지 않는 일상은 더 이상 무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도망간 거야? 거절당하기 싫어서?”

“……네. 저 비겁한 거 알아요. 근데 언니한테 거절당하는 거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그냥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민정의 가슴이 답답했다. 지민에게가 아니라, 끝까지 도망칠 구멍만 찾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야.”

“…….”

“나 봐.”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정은 지민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난 닷새간 지민은 도망치느라 빨라졌고, 민정은 그 이유를 몰라 뒤처져 있었다.

민정은 이제야 비로소, 서로 어긋난 채 공허하게 울리던 템포를 하나로 맞물리게 할 마지막 비트를 던졌다.

“나도 너 좋아해.”

정적이 흘렀다. 연습실 안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던 다른 멤버들의 악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고요했다. 지민의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리다 이내 커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울먹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멍청해졌다. 마치 평화롭게 자고 있다가 갑자기 물살에 떠내려간 수달처럼, 지민은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 둔 채 눈만 깜빡였다. 그 당황스러운 눈동자가 민정의 시선에 걸려 잘게 떨렸다.

“……네?”

“못 들었어? 나도 너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그만 도망가라고, 유지민.”

민정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자, 그제야 지민은 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수달이 세수를 하듯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붉어진 낯을 숨기려 애쓰는 꼴이 퍽 귀여웠다. 손바닥 사이로 비치는 지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믿기지 않는 환희 사이에서 지민의 손등이 허공을 배회했다.

민정은 더 이상의 도망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오른손으로 지민의 손목을 낚아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이제 템포 맞지? 우리.”

지민의 고개가 툭 꺾이며 민정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참았던 울음이 짧은 신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닷새 동안 혼자 아첼레란도였던 지민이 드디어 민정이라는 정박에 멈춰 선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민정과 지민의 관계는 묘하게 달라졌다. 겉으로 보기엔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았지만, 지민이 다시 민정에게 말을 걸고 민정도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에 멤버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너네 둘 화해했구나.”

인혜가 물을 들이키며 묻자, 지민이 발그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화해했어요.”

“나 진짜 PTSD 오는 줄 알았잖아. 너 오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 괜찮은 거지?”

“네!”

지민이 힘차게 대답하자, 민정은 옆에서 픽 웃었다. 화해라.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멤버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둘이 남았을 때, 민정이 지민의 손을 은근슬쩍 맞잡는다는 것. 집에 갈 때 당연하다는 듯이 같은 택시에 올라탄다는 것. 그리고 민정의 집 앞, 헤어짐이 아쉬워 지민이 민정의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일 봐요”라고 속삭인다는 것. 그리고 걔네가 영원히 몰라도 되는 것 또한.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민정이 연습실 문을 열며 무심하게 툭 던졌다.

“다들 모여봐. 새 곡 가져왔어.”

“벌써? 빠른데?”

“응. 세 곡.”

“세 곡?!”

주연이 기타 피크를 떨어뜨릴 정도로 놀라 소리쳤다.

“민정 언니, 언제 이렇게 많이 썼어?”

“……요새 영감이 좀 오더라고.”

민정이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그 과정을 다 지켜본 지민이 민정을 보며 방긋 웃자, 민정의 귀 끝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사실 보름 동안 민정의 방에서는 규칙적인 기계음이 밤낮없이 이어졌다. 손목 부상 때문에 최대한 연주를 자제하는 중이라 직접 드럼 세트 앞에 앉을 수는 없었지만, 대신 민정에겐 DAW 프로그램이 있었다.

민정은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오디오 트랙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마우스 클릭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채웠다. 일반적인 작곡 방법과는 달리, 드러머인 민정의 화면에는 항상 드럼 미디 데이터가 가장 먼저 뼈대처럼 쌓여갔다. 킥 드럼의 묵직한 파형과 스네어의 날카로운 어택감을 수천 번 조정하며 민정은 곡의 심장을 만들었다.

여긴 걔가 치고 들어와야 하니까. 민정은 가상 악기로 구현된 피아노 트랙을 불러와 대략적인 코드를 입혔다. 지민이 실제 연주할 때 느낄 그 건반의 무게감을 상상하며 벨로시티값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조절했다.

화면 속에서 색색의 막대기로 표현된 미디 노트들이 춤을 추듯 정렬되었다. 보름째 되는 날 새벽, 마침내 세 번째 곡의 익스포트 바가 100%를 채웠다. 민정은 완성된 세 개의 오디오 파일을 핸드폰에 저장하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오늘도 밤을 새웠다는 걸 알면 걔가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해댈까. 민정은 지민의 잔소리 섞인 걱정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자, 일단 들어봐.”

첫 번째 곡. 제목은 ‘어나더 걸’. 나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기에 뒤돌아볼 과거 따윈 없다는 가사가 담긴, 빠르고 거친 곡이었다.

“좋은데? 완전 우리 스타일이야.”

두 번째 곡. 제목은 ‘위 겟 베터’. 힘든 시간을 견디고 함께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묵직한 중간 템포의 곡이었다. 인혜가 악보를 훑으며 감탄했다.

“이것도 좋다. 가사가 진짜 우리 얘기 같아서 울컥한다.”

마지막 세 번째 곡. 민정이 악보를 나눠주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민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고 가만히 민정을 바라보았다.

“제목이……”

주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악보를 읽었다.

“’메이킹 미’?”

“응.”

“와, 제목부터 뭔가 감성 터지는데? 이건 뭐야?”

민정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작게 웅얼거렸다.

“……사랑 노래야.”

연습실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정적이 흘렀다. 멤버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민정에게 꽂혔다.

“뭐?”

“사랑 노래.”

“민정 언니가? 김민정이? 사랑 노래를?”

도영이 기절초풍할 표정으로 묻자, 민정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뭐. 왜. 난 사랑 노래 못 써?”

“아니, 못 쓴다는 게 아니라…… 언니답지 않아서.”

“사람이 변할 수도 있지.”

민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인혜가 악보를 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오, 가사 좋은데?”

“진짜?”

“응. 근데 이거……”

인혜가 예리한 눈빛으로 민정을 살폈다.

“야, 김민정. 너 누구 생겼지? 가사가 너무 구구절절해.”

민정은 대답 대신 지민을 힐끗 보았다. 그 찰나의 시선을 눈치 백단인 배인혜가 놓칠 리 없었다.

“어? 잠깐. 너 지금…… 오호……”

“아무것도 아니야! 연습이나 하자.”

민정이 황급히 드럼 의자에 앉아 스틱을 쥐었다. 멤버들의 웅성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와, 방금 유지민 쳐다본 거 봤어? 대박.”

“야, 설마 아니겠지?”

지민은 얼굴이 터질 듯 빨개져서 건반만 내려다봤고, 민정은 떨리는 심장을 감추며 크게 카운트를 외쳤다.

“야, 다들 자리 안 잡아? 시작한다?”

“야, 잠깐만! 설명 좀 해줘!”

“연습하면서 할게. 어차피 곡 들으면 다 알아.”

민정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

‘메이킹 미’의 전주가 시작됐다. 평소와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드럼 비트 위로 지민의 건반이 연인처럼 겹쳐졌다. 인혜가 마이크를 잡고 가사를 뱉는 순간, 연습실의 공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네가 날 바꿔가 / 다른 사람으로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 넌 날 완성시켜 가니까

인혜가 가사를 내뱉으며 민정을 쏘아봤다. 민정은 드럼을 치면서도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민 역시 건반을 누르는 손끝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민정의 리듬에 응답했다. 아첼레란도도, 리타르단도도 아닌, 두 사람만의 가장 완벽한 정박이 연습실을 꽉 채웠다.

곡이 끝나고 마지막 잔향이 채 사라지기도 전, 인혜가 마이크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으며 외쳤다.

“야! 너네 진짜 사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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