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MATTERZ

World Flow

019

울타리 앞

첫 번째 울타리 앞에 도착한 뒤, 이제 글래시는 설정이 아니라 사람과 소리와 기억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듣기 시작했다. 다만 한꺼번에 고상해진 건 아니었다. D+24처럼 모두가 같은 영상을 보던 시간은 지나갔다. 누군가는 아직 원재경 얼굴 컷만 저장했고, 누군가는 고선우 손 사진을 확대했고, 누군가는 취향은 별개라고 세 번 말한 뒤 Blue Light를 플리에 넣었다. 그래도 아주 작은 변화는 있었다. 하이햇이 더 이상 차규빈 진짜 치네의 증거로만 들리지 않았고, 피킹이 고선우 실제네의 증거로만 남지 않았다. 숨소리도 원재경 음원빨 아니네에서 조금 벗어났다. 증거 일을 하느라 바쁘던 소리들이 다시 곡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아래에는 이런 댓글도 붙었다.

난 아직 진짜냐 아니냐로 듣는 중취향은 아닌데 영상은 봤어원재경 얼굴 얘기 너무 많아서 피곤한데 노래는 계속 듣게 돼팬 아니야 이 말 이제 금지하자 제발금지하면 나 뭐라고 해

Blue Light는 입구였고, Pale Blue Dive는 몸을 앞으로 당기는 곡이었고, Mercury는 가까워지는 곡이었다. Bleed는 새는 소리였고, Parallel은 늦게 오는 곡이었고, Midnight Space는 멀어진 게 아니라 넓어진 곡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이 말도 너무 깔끔하다. 실제 댓글창에서는 훨씬 덜 정돈됐다.

공백기의 공식은 조용했다. 긴 인터뷰도 새 영상도 없었다. 대신 어느 오후, 공식 계정에 멤버별 한 줄이 올라왔다. 사진도 없이 글자만.

원재경: 같은 곡도 같은 마음으로 부르지는 못합니다.

차규빈: 더 세게 치는 것보다, 맞는 자리에 치는 게 중요했습니다.

고선우: 안 친 자리도 기타라고 생각했습니다.

윤다정: 소리가 너무 예쁘면 틀릴 때가 있습니다.

한준희: 낮은 곳에서 곡이 걷게 하고 싶었습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더 오래 씹었다. 고선우의 한 줄을 읽고 Bleed를 다시 듣고, 윤다정의 한 줄을 읽고 Midnight Space를 다시 틀고, 차규빈의 한 줄을 읽고 Blue Light Raw를 다시 보는 식이었다. 한 줄들이 전부 곡으로 돌아갔다. 공식이 준 건 답이 아니라 다시 듣는 이유였다.

글래시는 끝까지 우리는 하나예요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팀처럼 보였다는 말이 돌았다. 사실 그 말도 좀 예쁘다. 현장에선 더 투박하게 쓰였다. 붙어 있는 팀은 아닌데 곡에서는 안 빠져, 서로 안 침범해서 좋다, 원재경 중심인데 원재경만 남으면 망해. 이쪽이 더 정확했다.

물론 갤은 끝까지 곱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또 필요했다. 다정한 말만 남으면 금방 박제되고 식는다.

팬들끼리는 관계성을 뭐라고 부를지도 정리하지 못했다. 서로 안 침범하는 사이, 평행한 사람들, 과제 조원인데 다 A+ 받는 조. 마지막 말이 제일 웃겼고 그래서 제일 오래 남았다. 입덕 곡 추천도 매번 같은 싸움이었다. Blue Light, Mercury, 저는 Bleed, 입덕을 Bleed로 시키면 도망가요, 그럼 Blue Light 듣고 Bleed로 밀어 넣기. 페벌 얘기가 나오면 사운드 걱정이 붙었고, 답은 늘 같은 곳으로 갔다. 차규빈 믿어. 차규빈도 인간입니다. 맞아, 근데 믿어.

울타리 앞이라는 말은 그래서 맞았다. 넘은 게 아니라 도착한 쪽이었다. 앞에 선 사람은 이 울타리가 왜 있었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숨기려고 친 선이 아니라, 함부로 들이밀지 않기 위해 있던 선. 그 선이 있어서 안쪽이 더 선명해졌고, 그 선을 지켜서 결국 더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이제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고민은 남아야 했다. 아무 고민 없이 들어온 호감은 대개 빨리 나간다.

원재경이 뭐냐는 질문에는 이런 답이 돌았다. 보컬. 그건 아는데. 프론트. 그것도 아는데. 같은 문장을 매번 다르게 믿는 사람. 그래서 같은 곡도 계속 다시 듣게 되는 사람. 긴 글을 쓰는 쪽은 조금 다르게 정리했다. 이 팀의 합은 끈끈함이 아니라 거리의 정확성에서 온다고. 첫공 이후 사람들은 봤다고 말했고, Room 02 이후 사람들은 들었다고 말한다고. 글 좋은데 너무 과하다는 댓글이 붙었고, 다들 저장했다.

그날 밤에도 누군가는 이렇게 썼다.

아직 팬은 아니야.

그리고 4분 뒤 같은 계정이 Parallel은 왜 지금 더 좋지라고 썼다. 말은 늘 늦는다. 몸이 먼저 들어가고, 명칭은 뒤에서 허둥댄다. 다음은 더 큰 방이다. 그 방에서 이 조용한 의심과 조용한 애정이 어떻게 들릴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제 사람들은 신발끈을 묶고 있었다. 들어가려고 묶는지, 도망치려고 묶는지는 각자 다르게 우기겠지만.